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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숭,용봉,월산-금북정맥산행기(펌)



덕숭산(수덕사)에서 바라본 남쪽 금북정맥(나욱이님. 술꾼님 사진)
--- 위 : 작은 금강산-충남 홍성 용봉산.....낙상리(이응로 화백 생가)
     좌측 : 용봉산, 수암산(덕산온천, 윤봉길 의사 생가)
     우측 : 홍동산, 월산-관암산(수릿골), 멀리 희미한 오서산(도미설화)



( 권재형님 "금북정맥 산행기 퍼옴)   글 작성 시각 : 2004.12.18 14:30:06  


토요일 새벽 3시.
집을 나서는데 칼바람이 서슬 푸르게 날아다녀야 하는 계절임에도 겨울은 어디로 가고 남은 잠이 달아날 정도의 찬바람만 스산하게 분다.

수덕고개 잠든 식당 앞에 도착하니 일곱시 이십오분이다. 아직 해가 뜨지 않고 있다. 동지가 가까우니 밤이 무척이나 길다.
동쪽의 넓은 산이라는 뜻을 가진 홍동산(弘東山 309.8m)은 가야산과 덕숭산의 기세에 눌려 웅크리고 있는 듯 하다.

고개상회 왼쪽 임도를 따라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을 헤치고 오르막을 올라간다.

이십분 정도 임도를 따랐다. 낙엽이 많이 깔린 임도와 헤어지고 오른쪽 묘지 뒤로 첫 번째 봉우리를 향해 오른다.

봉우리에 올라(07:51) 주변을 둘러본다. 표시기가 왼쪽 능선을 따라 달려있다. 길은 걷기 좋다.
지도를 보면서 능선을 따르는데 많은 소나무가 잘려 쓰러져 있다. 누렇게 말라 죽어있다.

홍동산(08:16 육괴정에서 2.5㎞)을 지난다. 능선을 따라 산을 내려간다. 나무들은 모두 타버리고 타버린 나무사이로 길을 찾는데 진달래가 꽃을 피웠다. 나는 길을 찾느라 정신이 없지만 진달래는 계절이 하 수상해 정신이 없다. 계절을 잃어버린 산과 숯으로 변한 나무가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배낭 주머니에 꽂아둔 지도가 없어졌음을 알고 다시 홍동산을 향해 올라간다. 홍동산 정상부분 바위까지 올라가서 다시 되짚어 내려간다. 지도는 꽃피운 진달래나무 아래 떨어져 있다.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땀을 흘렸다.(09:15) 지도를 찾지 못했다면 산행을 중지하고 대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행이다.

오른쪽 능선은 골재채취로 산이 파괴되고 있다. 잡목을 헤치며 산을 내려가는데 날카로운 나뭇가지와 가시가 바지를 뚫고 들어와서 허벅지에 꽂힌다. 홍동산에서 가늠한 능선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지만 잡목이 길을 막고있어 생채기만 내고 돌아 나오기를 여러 번 했다. 묘지가 많은 곳을 지나 저수지 공사장까지 내려섰다. 공사장에는 인부들이 있다. 서로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뒤로 돌아서서 능선을 살펴보니 묘지가 많은 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묘지 앞을 지나 능선에 붙으면 정맥을 올바르게 가는 것이다. 뒤늦게 알았지만 돌아서 가고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정맥능선을 좌측에 두고 도로를 따라 걸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간다.

낙상리 상타마을 앞으로 나가서 아스팔트 이차선 도로를 따라 까치고개로 올라가는데 차들이 쌩쌩 지나간다. 두 번째 손을 드는 순간 짐차가 멈춘다. 달려가서 까치고개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타라고 한다. 오늘은 구겨지는 날이다. 지도를 잃어버려 한 시간을 헤매고 차까지 얻어 타고 아...

까치고개에 올라 홍성군쓰레기매립장 선 간판을 확인하고 홍성군환경사업소 위생쓰레기 매립장 입구까지 들어가서 표시기들만 확인하고 괴로움을 안고 돌아선다.

까치고개(10:00 홍동산에서 3.4㎞)에는 갈오리 표석과 예산군 덕산면과 갈산면 표시판이 있고 독립유공자 이근주묘가 400m 떨어져 있음을 알리는 표시판이 있다.

예전에 교회인 듯한 건물을 지나고 밭을 지나 일월산을 오른다. 오르막길을 따라 흰색 선이 계속되고 백열등이 많다.

일월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큰 나무가 없어 전망이 좋은 곳 바위 위에서 뒤로 돌아서서 지나온 능선과 걷지 못한 능선을 본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후회의 마음이 교차한다.

일월산 정상(10:40 까치고개에서 1.7㎞)에는 특이하게 생긴 큰 바위가 여럿 있고 팔각정이 있다. 태극기를 높이 달아놓은 곳 아래에는 불탄 사당이 시커먼 뼈대만 드러내놓고 있다. 사당 앞에는 洪州淸難祠重修碑(홍주청난사중수비)만 불탄 사당을 지키고 있다. 2002년 10월 홍성군수가 적어 달아놓은 경고문과 피뢰침이 있는 돌탑(예전 봉수대가 아닌가 추측된다.) 위에는 산불감시카메라(10:50)가 산을 지키고있고 돌탑은 철망으로 둘러져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홍성읍은 무척 넓고 건물들이 많다. 홍주종합운동장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정상에서 만난 주민의 말에 의하면 운동장 옆에 보이는 넓은 공터는 법원과 검찰청이 들어설 곳이라고 한다. 혹시 24시간 영업하는 찜질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바로 산아래 바짝 붙어있는 도로에 접해있는 신축건물을 가리키며 깨끗하고 넓고 좋으니 가보라고 한다. 정상에서는 서산방조제로 생긴 간월호도 멀리 보이고 공리저수지는 가깝게 보인다.

산을 내려서서 아스팔트도로를 걷다가 도로를 버리고 능선으로 들어서면 곧이어 헬리포트(10:57)가 나온다. 급한 내림길이 이어진다.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이 지나간다. 무덤(안동 장씨와 나주 정씨 묘지) 왼쪽으로 자갈이 깔린 살포쟁이고개(11:20)에 내려선다. 한쪽은 이미 포장이 된 것으로 보아 자갈이 깔린 곳까지 모두 포장이 될 것 같다.

살포쟁이 고개에서 25분을 걸었다. 무덤3기가 홍성읍을 향해 나란히 있는 곳이다. 길은 솔잎이 깔려있어 걷기 좋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잡목지대를 정리한곳을 지나는데 나무에 길게 메어져 있는 표시기를 본다. 곧 송전탑이 나올 것이다. 역시 정리된 길 끝에는 송전탑이 서있다. 흰색 긴 띠는 한국전력 인부들이 달아놓은 것임을 지나온 오랜 시간을 돌이켜보면 알 수 있다.

29번 국도 위 구황면과 홍성읍의 경계를 이루는 하고개(11:52 일월산에서 2.6㎞)에는 홍성민속박물관(테마박물관)이 있다. 입장료가 5,000원이라고 적혀있다. 하고개를 지나니 새로운 도로(4차선) 건너편에 서있는 해태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넓은 도로를 건너 해태상(11:58) 뒤로 능선에 올랐다. 왼쪽 아래에는 굴착기가 땅을 파고 있다. 이곳 공사현장은 홍성읍 우회도로의 시작지점이다.

왼쪽으로 도로와 터널공사장이 보이는 곳에는 전의이씨묘가 있고 그 앞으로 5분 정도 내려서니 시멘트도로 맞고개(12:30 하고개에서 38분)를 건넌다. 포도밭에는 인분을 뿌렸는지 구린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6분을 걸었을까 길은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려간다. 오른쪽 좋은 길은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수리고개(12:40 맞고개에서 10분)를 넘어가는데 왼쪽에 터널공사장이 가깝게 보인다. 좌우로는 농토가 함께 한다.

정맥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남산에 오르니(13:00) 팔각정 아래 벤치와 삼각점이 있다. 팔각정에 올라 홍성읍을 내려다보며 음료수를 한 모금하고 다시 갈림길로 돌아간다. 내려가는 길은 나무계단이 이어지고 길은 산책을 하기 좋도록 해두었다. 짧은 내림길이지만 이정표가 곳곳에 있다.

남산에서 내려서서 정맥은 오른쪽으로 꽃조개고개를 넘어야 하지만 충령사를 둘러보려고 왼쪽으로 도는데 모서리에 충혼탑이 높게 서있다. 충혼탑 아래에 서정주 시인의 시가 음각 되어있다. 충령사는 문이 닫혀있어 둘러보지 못했다. 충령사 문 앞에 있는 검은색 비석은 국가유공자충혼탑이다.

한용운선사상을 둘러보고 공사로 어수선한 21번 국도 위 꽃조개고개를 건너 머리위로 높게 지나가는 공사중인 도로 아래를 통과해 절개지 끝까지 걸어간다. 절개지가 끝나는 곳에서 능선으로 오르는 들머리에 표시기가 달려있다. 절개지 위에 올라서니(13:26 수리고개에서 1.5㎞) 수리고개 옆에서 시작된 터널공사장과 이어지는 터널공사장이 보인다. 이 터널의 이름은 마온터널이며 도로는 하고개에서 수리고개와 꽃조개고개를 지나 홍성읍의 외각을 한바퀴 돌아가는 홍성읍의 우회도로이며 2006년 말 완공예정이라고 한다.

절개지 위에서 능선을 따르는데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능선은 방향을 여러 번 바꾸며 신성역을 향해간다.

개들이 짖어대는 신성역 앞마을은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장항선(충청남도 천안시에서 온양시, 예산군, 홍성군, 대천시를 지나 서천군 장항읍에 이르는 철도. 총연장 143.8㎞ 충청남도 남서부지역의 중요한 교통 축이다. 예전에는 충남선이라 불렀다.)이 지나가는 신성역(13:58 꽃조개고개에서 1㎞)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매표소에 있는 역무원과 인사를 나누고 철도를 건넌다.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와 은행나무를 지나 낮은 산으로 오르는데 묘지들이 많다. 묘지 앞에는 대한주택공사 충남지사에서 분묘이장을 강제하는 표시판이 꽂혀있다. 표시판은 모두 부수어져 있다.

능선에 올라 독도를 한다. 방향을 오른쪽으로 잡고 능선을 따르는데 오른쪽 아래에는 장항선도 함께 한다. 표시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방향만 잡고 잡목사이로 산길을 간다.

인삼밭이 나오면서 길은 아주 좋아진다. 삼각점이 있는 162.4m봉(14:38)까지 길은 좋다.

거대한 둥근 돌에 맞아 꺼진 듯 한 지역이 나온다. 석회암 지질에서 볼 수 있는 돌리네(카르스트)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고(14:59) 산을 내려가니 아스팔트도로가 나온다. 도로를 건너 정맥을 이어간다.

냄새나는 축사 옆으로 예쁜 집이 있고 그 앞으로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갈마고개에 내려선다.(15:10 신성역에서 3.2㎞) 홍동면과 광천읍의 경계인 이곳은 아스팔트2차선도로이고 공수마을 표석이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다.

넓은 농로를 따라 언덕 위에 하얀 집을 향해 걸어간다. 집 옆에는 파란 물통이 있고 소나무가 그림같이 서있다.(15:17) 집을 지나 2분을 걸어가니 열녀난향의 묘(烈女蘭香의 墓)가 나오고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아홉굴고개(15:30)에는 홍동면표시판, 독립유공자 황윤성의 묘소 800m 표시판, 버스정류장, 원천리 중원마을 표석(거대한 자연석) 등이 있다. 상원마을 방죽골 이정표 앞에서 낮 익은 차가 서있다. 채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 와있느냐고 물었다. 채미는 미리 답사를 해보니 차가 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이 계속 되는 부분이라며 한사코 차를 타라고 한다. 나는 걸어가겠다고 하고 채미는 타라고 하고 결국 내가졌다. 방죽골 화살표방향으로 넓은 시멘트 길을 차를 타고 간다. 참 이상하고 찜찜하다.

3층집을 지난다 길은 계속 넓은 길이라 거침이 없다. 미생물환경이용연구소를 지나고 양로원과 은퇴농장이 나온다. 홍광농장을 지나서 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나는 내리겠다고 하고 더가도 된다고 하고 결국 내가 이겼다. 30분에서 40분 정도 시간을 단축시킨 것 같다. 그런 만큼 애초에 잡은 목표지점인 생미고개를 지나서 신풍(하풍)고개까지 갈 생각이다.

오거리에서 비포장 넓은 길로 들어서서 냉이 밭을 지나는데 냉이를 수확하는 부부를 만났다. 부부에게 요즘도 냉이가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내게 어디 가느냐고 되레 묻는다. 웃음으로 답하고 계속되는 넓은 길을 걸어간다.

기독교묘지 표시판(16:15 감리회 광천교회 안식의 동산) 옆에는 돌을 두른 무덤이 여러 기 있다. 표시판에는 유교식 법을 따르지 말 것과 주의사항을 적어두었다.

소나무 숲 속에 냉장고가 여러 개 버려져 있다.(16:18) 오래 전에 버려졌는지 녹이 쓸어있다.

시멘트도로인 도재고개를 지나 푹 꺼진 임도를 지나고 밭길을 따라간다. 굵은 나무를 베어서 포개어 놓은 곳에는 밭이 있고 포장된 길은 넓다. 이어서 기미삼일운동기념비가 있는 애국선열들의 묘지가 나온다. 애국지사 김동하추모비를 포함해 여러 개 비가 서있다. 주변을 둘러보고 길을 재촉한다.

96번 지방도 위 생미고개(16:35 아홉골고개에서 4.3㎞)는 아스팔트2차선 도로이다. 길다란 자연석 위에 신동마을 이라고 적어놓았다. 신동리교회 표시판이 길가에 있고 길 건너에 창고도 있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KT광천지점 장곡분기국사 건물 앞에서 채미가 기다리고 있다. 원래 목표한 종착지라서 기다리고 있다며 여기서 끝내자고 한다. 어스름은 내리고 있지만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신풍(하풍)고개까지는 충분할 것 같다.

짐승(고라니와 멧돼지로 추정) 발자국이 여러 개 찍혀있는 흙 길을 지나서 걸어가는데 소나무가 모조리 베어져 있는 곳이 나온다. 솔잎을 보니 아직 싱싱함을 간직하고 있다. 벤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참 많은 나무가 잘려 나자빠져있다.

중방리와 꽃밭굴을 이어주는 도로 위 꽃밭굴고개(17:12)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독립유공자 윤형중, 윤익중, 윤낙중, 윤의석 묘소와 표지판이다. 묘지는 잘 단장이 되어있고 기미3.1독립운동 및 항일투쟁공훈종합비와 독립유공자가 된 경위를 적어둔 안내판이 서있다.

완전히 해는 넘어갔고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그러나 랜턴을 꺼내지는 않고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길을 찾아간다. 넓고 좋은 길을 걸어가다가 왼쪽 숲으로 방향을 바꾸는 곳만 조심하면 신풍고개까지 무난하게 내려선다. (17:30 생미고개에서 3㎞)

정맥을 가는 동지들의 산행기에 적힌 하풍고개는 현지에서는 알지 못한다. 장곡면사무소에 문의를 했다. 역시 신풍고개라고 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하풍고개는 모른다.

신풍고개에 내려서면서 무덤을 지나는데 대구서씨라는 글을 적어놓은 묘지석이 보인다. 달성군이 지금은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지만 그래도 대구서씨는 아니다. 정확하게 달성서씨다. 그냥 보고 지나치기에 참으로 괴로운 묘지석이다.

산행을 마치고 : 채미와 만나 일월산 정상에서 찜 해둔 홍성의 찜질방으로 가서 씻고 먹고 잤다.

채미는 낮에 홍성읍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문화재수리기능인(인간문화재) 전흥수씨 개인이 100억 원을 들여 지은 한국고건축박물관을 둘러봤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 TV에서 한 번 본적이 있다.

◎ 2004. 12. 11(토) 맑음.
◎ 산행 기점과 종점 :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옆 40번 국도 수덕고개(육괴정 고개상회)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홍성군 장곡면 신풍1리 포장도로 신풍고개에서 산행을 마침.
◎ 도상거리 : 약 27km
◎ 산행 중 통과지점과 시간 : 수덕고개(07:25) - 홍동산(08:16 수덕고개에서 2.5㎞) - 까치고개(10:00 홍동산에서 3.4㎞) - 일월산(10:40 까치고개에서 3.4㎞) - 살포쟁이고개(11:20) - 하고개(11:52 일월산에서 2.6㎞) - 맞고개(12:30) - 수리고개(12:40) - 정맥에서 벗어나 있는 남산(13:00) - 꽃조개고개 지나 절개지 올라서서(13:26 수리고개에서 1.5㎞) - 신성역(13:58 꽃조개고개에서 1㎞) - 162.4m봉 삼각점(14:38) - 갈마고개(15:10 신성역에서 3.2) - 열녀 난향의 묘(15:19) - 아홉굴고개(15:30) - 생미고개(16:35 아홉굴고개에서 4.3㎞) - 꽃밭굴고개(17:12 독립유공자 파평윤씨 3형제와 당질 의석의 묘) - 신풍고개(17:30 생미고개에서 3㎞)
◎ 홀로 걸음.
◎ 산행시간 : 10시간 30분 (표시기를 한 구간에 50개 이상 달면서 진행을 하니 예상보다 산행시간이 많이 걸린다.)
◎ 도재고개 주변 쓰레기처리와 신풍고개에 대한문의 : 홍성군 장곡면 041-630-1606

** 지나온 구간 유적과 주요지점에 보충설명 **

** 일월산 홍주청난사중수비(洪州淸難祠重修碑) : 선조29년 7월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켜 임천, 정산, 청양, 대흥을 지나 홍주지방으로 쳐들어오자 당시 홍주목사 홍가신이 무장 박명원, 수사 최호, 체찰종사 신강행 등과 반란군을 평정하여 영의정 이항복, 우의정 김명원의 제의에 의해 이들을 공신으로 책목해 만들어진 사당이며 비각이다. (청난공신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자에게 내린 훈공)

** 일월산 :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구항면 오봉리, 홍북면 중계리 경계 상에 있는 높이 394m의 일월산또는 백월산이라고 하며 홍성읍에서 서쪽으로 약 4㎞떨어진 곳에 위치한 홍성의 진산이다. 서해가 눈앞에 펼쳐지고 동편으로는 멀리 합덕평야와 봉수산이 지척에서 보는 듯 바라보이고 홍성읍을 품안에 품은 듯하다. 동쪽으로 동해가 바라보이고 해와 달이 솟는 것을 먼저 바라본다 하여 일월산이라고 부른다. 꼭대기에는 일자봉 월자봉의 두 봉우리가 솟아 있고 천축사라는 사찰터와 산령각씨 부인당 용화사 천화사 등이 있다. 특히 일월산은 태백산의 가랑이에 위치 음기가 강한 여산으로 알려져 그믐날만 되면 전국 각지의 무속인들이 이 산을 찾아 영험함과 신통함이 더한 내림굿을 한다. 그렇게 하면 점괘가 신통해진다 하여 무속인들로부터 성산으로 추앙 받는 곳이기도 하다』

** 홍성군 : 홍성군은 충절의 위인 최영, 성삼문, 김좌진, 한용운, 김복한, 홍주의병 등을 배출했으며, 내포 홍주문화의 발흥지로 42개소(국가 8, 도 34)의 문화 유적지가 산재해 있으며, 한국 전통 춤의 아버지 한성준, 조선 판소리의 대가 최선달을 배출했다. 홍성군수 이상선이 단기4333년(경진) 음력 10월 15일 세운 비석에는 靈耀臺 定礎文(영요대 정초문) "백월산은 國難克服(국난극복)의 悠久(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이 땅을 지켜 온 영산이며 진산이다. 山河襟帶(산하금대)와 國泰民福(국태민복)을 축원하며 靈耀臺(영요대)를 定礎(정초)하니 吉祥(길상)의 烽燧(봉수 즉 봉화)로 홍주의 瑞運(서운)이 萬代(만대)에 繁昌(번창)하리라" 라는 비문이 음각 되어 있다.

** 하고개 洪州丙午義兵駐屯遺址碑(홍주병오의병주둔유지비) : 조선말 의병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 당시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의 봉화가 홍주의 하우고개에서 맨 처음 올라, 의병들이 홍산, 서천, 남포, 보령을 거쳐 광천에 와서 대부대가 되었으며, 이 주력부대가 광천에서 구항 마을과 신당곡을 거쳐 하우고개에 당도하였고, 천북, 결성, 서부에서 궐기한 의병들도 서산도로로 따라 하우고개로 집결하였다. 국토를 지키겠다는 의열들의 모임이 홍주성을 2㎞ 추격하여 월산 낙맥(?)에 진을 치고 만반의 전투태세를 구비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홍주성 탈환의 진군 나팔이 울리어 1906년의 병오의병 거사가 발족되었다고 한다.

** 꽃조개고개 내리기 전 충령사 앞 충혼탑에는 시가 음각 되어있다.

하늘땅이 오래듯 살려는 겨레는
끝없는 충성을 나라에 다 하고
자손 만대를 늘리여 갈 집안은
먼저 어버이께 효도를 다하나니
여기 불어 오가는 맑은바람이여
늘항상 이뜻을 자손에게 전해라

1977년 10월 15일

글 지은이 서 정 주
글 쓴 이 김 충 현

** 한용운선사상(卍海韓龍雲禪師像) 아래에는 선생의 시 두 편이 적혀있다.

님 이 沈 默

님 은 갓 슴 니 다
아 사 랑 하 는 나 의 님 은
갓 슴 니 다
푸 른 산 빗 을 ㅅㄱㅐ 치 고
댠 풍 나 무 숩 을........


讀 者 에 게
上 毗

밤은 얼 마 나 되 얏 는 지
모 르 것 슴 니 다
雪 嶽 山 의 무 거 운 그 림 자 는
엷 어 감 니 다
새 벽종 을
기 다 리 면 서
붓을 던 짐 니 다

선사상 옆에는 선사상을 세우게 된 동기와 모금내역 선사의 이력 등이 적혀있다. (위치 : 홍성군 홍성읍 남장리, 승려이고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선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동상이다. 1985년 12월 2일 준공, 13만 홍성군민과 충남지역 수개군 학생, 전국의 불교계, 그리고 가계 인사의 성금 등 1억 5천 5백 만원의 예산이 들었다. 부지 2745평 높이 3.2m)

** 한용운(韓龍云:1889-1944) : 고종16년(1879) 8월 29일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 이라는 곳에서 청주한씨 서원군 한명보의 후손인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 방씨의 차남으로 출생한 선생은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 본명은 정옥(貞玉), 불명은 용운(龍云), 법호는 만해 (卍海, 혹은 萬海)라 한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26세에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하여 경악의 대가로 명승강사 가 되었다.
1910년에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 불교 동맹 등을 반대하고 33세에 만주로 망명하여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지사들을 만나서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월에 최린과 상의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 할 것을 결의하였으니 이것이 3.1 만세운동의 발단이 되었으며,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 보완하였다. 불교대전, 불교 유신론, 채근담강의, 님의침묵 등을 저작하고 유심지, 불교지를 발간하였다. 선생은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 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기고 1944년 6월29일(음 5월 9일)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壯)에서 별세하였다.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 터에는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 기미3.1독립운동 및 항일투쟁공훈종합비 안내판 내용 : 파평윤씨 네 분 [건국훈장 애국장 윤익중, 건국훈장 애족장 윤형중, 건국훈장 애족장 윤낙중(기순), 건국훈장 애족장 윤의식 위 세 분의 당질(종질:사촌형제의 아들)] 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0월 26일 파평윤씨 화계 종친회에서 건립. 장곡만세운동에 참가한 500여명의 선두에 서서 옥고를 치렀고 윤익중은 중앙고보시절 김상옥이 주도한 혁신단에 가입해서 혁신공보를 발간 독립사상고취를 위한 기사와 논설을 썼으며 김상옥이 주도한 암살단에서도 활약을 했다. 등의 내용이 적혀있다.

** 한국고건축박물관 : 1998년 10월 개관하였다. 부지 약 1만 6,500㎡, 연건평 약 3,600㎡에 이른다. 제1·2전시관을 비롯하여 사대부(양반) 가옥, 평민 가옥, 초가삼간, 연수원, 중국관, 일본관, 야외공원장, 사진전시관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건축 기능인들의 기능을 높이고 고건축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교육 터전으로 활용하는 것을 설립 목적으로 한다.
주요 전시물로는 강릉객사문, 송광사 국사전,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서울 남대문, 광룡사 약사전, 정전태실, 중화전 등의 축소 모형이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8시~오후 6시이며, 관람료는 2003년 10월부터 유료로 전환되었으며, 월요일에는 휴관한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 산152-18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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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
충청도에 ‘자미원(紫微垣)’이란 천하의 명당이 있다. 물론 구전되는 전설이다. 이곳 명당에 묘를 쓰면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력자가 나온다고 한다. 칭기즈칸이나 알렉산더보다 더 막강한 지도자를 잉태할 수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조선 말엽 흥선군이 경기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곳 예산 가야산 자락에 쓰고 나서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는 얘기도 있다. 이후 흥선군은 풍수를 더욱 신봉, 충청도 어딘가에 있다는 자미원을 찾아나섰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는 것. 일제시대를 비롯해 해방 이후에도 자미원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 누구도 자미원을 찾았다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선친이 옮겨간 곳을 풍수적으로 살핀다면 어떨까. 자미원의 천하명당일까. 2004년 10월10일 일요일 오후 3시. 관광버스 한 대가 충남 예산군 신양면 녹문리 마을 입구에 멈춰 섰다. 이장한 이 전 총재의 선친 묘는 이 마을 뒷산에 있다. 차에서 내린 일행은 등산복 차림의 50~70대가 대부분이었는데, 손에는 필기도구와 패철(나침반), 혹은 수맥 측정용 ‘ㄱ자 모양의 쇠막대기(L-로드)’ 등을 들고 있었다. 마침 이곳을 찾은 최낙기(선문대 사회교육원 풍수 담당) 교수에게 이 전 총재의 선영 이장지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이곳이 자미원 명당 터가 맞습니까?”

“모르지요.”

“풍수적으로 좋은 땅입니까?”

“이전 선영보다는 훨씬 좋지만 엄밀하게 혈(穴, 명당)은 아닙니다.”

“대권을 장악할 만한 땅입니까?”

“그야 모르지요,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 하지 않습니까. 여러 무덤들을 비교해봐야 알지, 한 집안의 선영만 보고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다스릴 권력자 나올 ‘명당 중 명당’?

관광버스를 타고 온 또 다른 답사팀 인솔자의 설명도 최교수와 대동소이하다.

“새로 이장된 이곳은 앞의 예산읍 자리보다 100배 낫다. 이 일대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잡은 자리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백호날이 벗어났다. 좌청룡이 겹겹이 뻗어 있는 것을 보아 아들들이 잘되기를 의식하고 쓴 듯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조상의 무덤을 이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전 총재의 선친 묘 이장은 여러 면에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부친이 돌아가신 지 1년 반이 채 안 되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이장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개 이장은 시신을 안장하고 시신이 육탈(肉脫)되는 데 걸리는 최소한 4~5년의 시간이 지나야 가능하다. 이 전 총재 측은 “민원제기와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 전해진다.

2002년 대선 직전 ‘주간동아’는 이 전 총재의 부친 이홍규 옹의 묘와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 선친 묘를 함께 비교, “풍수적으로 이회창 후보보다 노무현 후보가 더 강하다”는 기사(주간동아 363호 참조)를 내보냈다.

“세 후보 가운데 선영으로 본다면 노무현 후보가 가장 좋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너무 강한 기운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이 노후보에게 필요할 것 같다. … 그의 생가 역시 역대 대통령의 생가 터와 매우 유사해 산자락 끝 집이면서 좌청룡 끝 집에 해당한다.”



조선시대부터 소원 성취 가능성 기대

대선이 끝나자 이회창 후보가 ‘풍수의 기(氣)’ 싸움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졌다는 말이 돌았다. 이번 이장을 놓고 정치적 해석을 덧붙이는 이유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그러나 풍수가들이 이번 이장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이곳 예산에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와 한화갑 민주당 대표 등 거물급 전·현직 정치인의 선영이 차례로 이장됐기 때문이다.

김 전 총재가 선친을 모신 곳은 충남 예산군 신양면 하천리. 이곳으로 옮긴 것은 2001년으로, 대선을 1년여 앞둔 시점이었다. 풍수 호사가들은 김 전 총재의 선영이 선 자리를 평소 ‘왕기가 서린 명당’이라고 평했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목포에 있던 선영 묘를 이곳으로 이장한 것도 2001년. 민주당 내에서 유력한 차기 주자로 인정받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 한대표는 ‘007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은밀하게 이장을 했다. 그러나 한대표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민주당 장전형 대변인은 확인 요청에 대해 즉답을 피했다. 김 전 총재와 한대표의 선영은 직선거리로 2km가 채 안 되며 주산을 같이하는 산 능선 양쪽에 쓰여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행정구역은 공주이나 예산군과 접경지역임). 이 전 총재를 비롯한 세 사람의 선영은 신양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반경 5km 안에 모두 있다.


김 전 총재와 한대표가 비슷한 시기에 선영을 이장하자 “그곳이 자미원 명당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다. 물론 반론도 있었다. 자미원을 놓고 터져나온 갑론을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졌다. 그러다가 이 전 총재가 선친 묘를 이 일대로 옮기면서 자미원 논쟁이 다시 일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최고의 권력을 지향했던 이들이 부모나 조부모 묘를 이장해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거나 최소한 그 가능성을 기대한 것은 20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공통점(표1, 2)이 있다. 특히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맞붙은 대선 경쟁에서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복귀한 뒤 부모 묘를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경기 용인으로 이장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장을 한 정치가들을 보면 이장 직후 그들의 발언이나 정치적 행보가 바빠진다. 우연인지 이 전 총재 역시 최근 들어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국가보안법에 대한 강한 의견 표명을 한 것이나 추석 직후 서울 남대문에 개인사무실을 내는 등 정치적인 행보를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관측을 불러일으켰다. 권력과 풍수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임금과 제후가 나는 큰 명당은 기이한 형태의 괴혈에 있는데, 하늘이 덕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덕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면, 천심을 얻은 사람에게 대권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민심은 천심이라 했다. 즉 민심을 얻은 자에게 대권이 주어진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풍수 논리도 그러한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풍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 중인 일상의 삶이자, 또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버리기 아까운 계륵(鷄肋)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기사제공 :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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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관도사 손석우



전. 현직 대통령 가족 묘터 봐준 당대 최고의 지관

육관도사 손석우 충남 가야산 대원군 부친묘 옆에 자신을 묻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가족묘원은 천선하강의 명당입니다.
" 지난 대선 때 김대통령의 가족묘터를 봐준 육관도사 손석우씨가 8월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죽어서도 대화제.

육관도사가 묻힌 곳이 명당이 것이라는 데 세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
그러나 충남 가야산에 묻힌 그의 무덤은 불법이라 해서 이장될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한다.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 집안의 묘 단골로 잡아줬다

"왕비가 탄생하고 집안이 흥해질 겁니다."

김복동의원(노태우 전 대통령 처남)의 회고이다.

"저는 풍수지리 같은 걸 신뢰하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집안 형님께서 좋은 터에다 아버님을 모시기 위해 육관 손석우씨를 찾았나 봐요.
손씨는 너스레가 뛰어난 지관이었습니다.
손씨는 대구 북쪽으로 10여 Km 되는 동명마을 뒷산에다 묘를 쓰라고 했지요.
선친묘에 서기가 서려있는 고로 우리집안이 발복할 거라며 허풍을 떨었으나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습니다."

서울 망우리 묘지기 한 노인은 육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두환씨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이었습니다.
한밤중에 손석우씨가 수많은 장정을 데리고 공동묘지로 올라왔습니다.
관리사무소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순자 여사의 할아버지 이봉학 묘를 파헤치는 겁니다.
내가 달려가 이 무슨 짓이냐 호통을 하자 손석우씨가 국보위 위원장(당시 전두환씨 직책) 허락 받고 묘를 이장하는 중이나 잠자코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손석우씨의 진두지휘로 이봉학씨의 관은 헬리콥터로 경기 용인군 내사면 금박산 정상으로 옮겨졌다.
이순자 여사가 할아버지 묘를 옮기게된 사연은 이렇다.
이순자씨 아버지 이규동씨가 은밀히 손석우씨를 만났다.
이규동씨는 손씨에게 "우리 집안 발흥을 위해 명당 자리 하나 잡아주시구려"라고 말했다.
손씨는 대뜸 왕비가 날 자리가 있다며 당장 이봉학의 묘를 용인 금박산 정상에다 이장하라고 권유했다.

"그곳은 학이 날아가는 형국의 명당터입니다요. 곧 왕비가 날 자리지요."

손석우씨는 지난 대선 직전 하의도에 있던 김대중 대통령 부모의 묘와 포천 천주교 묘역에 있던 전처와 여동생의 묘를 경기도 용인시 이동명 묘봉리 산에다 이장시켰다.

한편 손석우씨는 93년 자신의 베스트셀러 '터'에서 김일성 사망을 1년 앞서 예언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자칭 당대 최고의 지관, 손석우씨가 8월 26일 지방 출장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72세.
그는 죽어서도 화제를 모았다.
언론은 손석우씨의 죽음을 뒤쫓았다.

그는 풍수의 달인.
자신의 무덤 터는 비범할 터.
어느 곳에다 자신을 묻었는가? 그 묘터의 형국은 어떠한가.
그의 돌연한 심장마비는 진실인가.
그의 죽음을 놓고 왜 가족들은 한동안 쉬쉬했나.
그는 각종 송사에 휘말렸는데 그의 잘못은 무엇인가.
사망하기 전 그의 행적은.



육관의 묘터는 후손에게 화목을 가져다주는 길지

육관은 충남 가야산에다 자신의 시신을 묻었다.
가족들은 8월 28일.
비밀리에 육관의 시신을 거두어 장지로 향했다. 당대 최고의 풍수면 호화스런 꽃상여도 있을 법한데 그러나 영결식엔 가족외 문상객은 없었다.
09시 발인제로 시작, 개토제 산신제 하관 평토제 반혼제 등으로 엄수했다.
장사를 지내고 3일째 되는 날 삼우제를 지내고 길거리에 짚을 깔아 밥을 놓고선 혼이 그 밥을 먹도록 했다.

육관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나 한동안 가족들이 외부인과 단절했으므로 그의 묘터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와 절친했다는 어느 풍수는, 치악산에 육관의 묘가 있다느니 고향 울진 평해라느니 내뱉았지만 모두 낭설이었다.
가야산..
육관의 묘는 어떤 형국일까?



기자는 풍수연구가인 야은 거사(김승기)와 함께 육관의 묘를 답사하기 위해 충남 가야산을 향했다.
차 안에서 야은거사가 말한다.

"원래 대원군 아버지 묘는 연천땅 남송정에 있었습니다.
풍수에 능한 대원군은 풍수 정만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해지지요.
정풍수 말하길 '내포 지방에 명당자리가 둘 있는데 북쪽(가야산)에는 이대천자지지가 있고, 남쪽(홍성 오서산)에는 만대영화지지가 있나이다.
' 대원군은 자미원이 있다는 가야산을 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풍수는 가야산을 찾게 됩니다.
가야산 주봉인 석문봉에서 뻗어내린 송낙바위 맥이 동으로 달리다가 멎은 곳에 1천4백년된 고찰 가야사가 있었어요.



정풍수는 이 절 5층 석탑 자리가 대명당터임을 인지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가 자미원이다 하며 탄복을 합니다.
그러나 이 곳에 묘를 쓰려면 불탑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 일이 그리 쉽습니까.
영악한 대원군은 임시방편으로 가야사에서 서북쪽 4백m 지점에다 부친을 모시게 되지요.
그후 대원군은 가야사에 승려가 살지 못하도록 합니다.
급기야 이절은 폐절이 되고 맙니다.
승려들로 하여금 절제 불을 지르게 합니다.
이렇게 한 후 마침내 대원군은 부친을 가야사 5층 석탑 자리에 모시게 됩니다.

이후 대원군 형님인 흥녕군과 흥원군이 악몽을 꾸게 되지요.
하얀 소복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크게 노하며, 나는 금탑의 사신이다. 내 집을 허물고 네 아비를 묻어? 미구에 너희들은 죽는 줄 알아라.
형님들의 꿈 이야기를 전해들은 대원군은 도리어 이렇게 말하지요.
형님, 그렇다면 그 곳은 필경 길지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렇게 하여 묘를 쓴 겁니다.
나중 대원군은 부처를 불태운 게 민망했던지 아들이 임금으로 즉위하자마자 5층석탑이 있는 곳 아래에 보덕사라는 절을 짓게 되죠.

손석우 영감은 평소에 대원군이 찾은 곳은 자미원이 아니다.
가야산엔 남연군 묘보다 더 좋은 명당터가 있다.
그곳이 바로 자미원이다 라고 주장했지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육관의 묘가 육관이 말했던 자미원인가 보죠?"

차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멈췄다.
3부 능선 산길을 걷노라니 길가에 국화가 피어 있다.
예산, 서산에서는 국화꽃 잎을 따서 찹쌀가루와 반죽하여 단자를 만들어 먹는데 이를 국화전이라 한다.

육관이 묻힌 가야산 연봉 중의 상가리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처지가 이러할진데 어떻게 이곳에다 묘를 썼을까.
도립공원에 묘를 쓴 게 탄로 날까봐 가족들은 그토록 쉬쉬한 게 아닐까
(아들은 자신의 명의로 된 땅에 아버지를 모셨다고 주장한다).



가야산은 원효대사가 머물고 있었다는 원효암 자리가 있으며 넓은 동굴과 맑은 샘이 있다.

원효는 가야산을 이렇게 칭송했다.

"산모습 물기운이 나라 안에서 가장 뛰어난 형국은 사람의 내장부와 같노라."

육관의 묘는 석문봉 기슭에 있었다.
대원군의 친산인 남연군 묘도 이 봉우리 아래에 있다. 석문봉 산정에서 내려다보면 골과 골을 뒤덮는 임해가 장관이다.
중국 대륙을 향해 몸을 낮추는 낙조와 노을이 그만이고 산속에는 나무숲이 우거진 옥녀폭포 계곡이 있다.

육관의 묘 앞에는 비석도 석상도 없는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봉분이었다.
손씨의 아들 광식씨에 의하면 지난해 9월 육관이 몸소 묘터를 잡고 자신이 이 곳에 묻혀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한다.
이유는 바로 이곳이야말로 북두칠성의 기운을 한몸에 받는 곳이라는 것이다. 모지 앞엔 못이 있다.
생전에 육관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미원 터 앞엔 못이 있지. 북두칠성에서 내려온 천사가 잠시 이 못에서 목욕재계하고 다시 천상을 향한다네.
용연이라 할 수 있지.
용들이 사는. 이 못 위에는 병풍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는 남성의 힘찬 심벌 같이 생겼다네."

묘를 둘러보니 영락없이 생전에 육관이 말한 자미원 바로 그곳이다.
야은 거사가 무덤터를 평한다.

"이 자리는 형국론으로 복치형입니다.
꿩이 적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알을 품고 웅크린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복치형으로 대표적인 묘혈은 개성에 있는 파평 윤씨의 묘혈이죠.
파평 윤씨 후손들에 의하면 옛날 윤씨가 고향을 등지고 개성에 와서 살았는데,
그가 죽자 운구를 하던 도중 갑자기 가마 막대가 부러져서 더 이상 운구를 못해 할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매장을 했는데 그 곳이 다시없이 좋은 복치형 자리죠.
이 곳에서 파평 윤씨를 비롯해 남원 윤씨, 철원 윤씨 등의 분파가 나와 후손들이 번창하게 됩니다.

복치형은 자손들이 건강하고 평안하게 그리고 적당한 부도 갖추고 살 수 있는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육관 묘자리는 수맥이 전혀 흐르지 않는 좋은 터입니다.
풍수의 기본인 용혈사수가 잘 갖추어졌지만, 한가지 흠이라면 사신사 중에서 주작이 밋밋하다는 게 흠입니다.
다행히 청룡이 백호를 싸안고 있어 장풍득수에는 지장이 없는 자리입니다.

혈장 좌우 물길이 서출동류라서 좋고, 상가리 저수지가 5년전에 생겨서 계수즉지로서 좋습니다."

야은 거사가 수맥 탐지기구인 L 로드로 손씨의 무덤 주변엔 수맥이 흘러가는지 안 흘러가는지를 체크한다. 기구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어서도 화제를 모았던 손석우씨 그는 사망 전 많은 송사에 연루되기도

모 방송국 'PD 수첩' 취재팀은 육관을 파렴치범이라고 공격했다.
취재팀은 육관이 고객에게 명당을 잡아주겠다고 유혹, 상당한 돈을 갈취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서울지법 민사합의 16부는 손석우씨로부터 명당이란 말을 듣고 손씨 아들의 땅을 사서 조상 묘지로 썼던 한모씨가 손씨 등을 상대로 낸 매매대금 반환청구소송에서 손씨측은 한씨에게 매매대금을 돌려주라고 했다.
졸지에 사기꾼으로 전락하게 된 육관은 사망하기 1년 전부터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며 산천을 주유했다.
손씨 사망과 관련 그의 최근 행적을 추적 취재해 본다.

손씨는 한 여인에게 이런 양심고백을 했다.

충북 중원군 동량면 조동리 뒷산에 가면 한울선원이라는 기도터가 있다.
이곳은 홍윤흥이라는 단군을 숭배하는 여인이 세웠다.
기도터 앞에는 쌍거북 바위가 있다.
산기도 하기에 좋았던지 서의현 전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등이 이곳에 자주 내려온다.
손석우씨도 지난 겨울, 진눈개비를 맞으며 이곳에 내려와 산기도를 드렸다.
이곳은 갈마음수혈, 목마른 말이 와서 목을 축이고 가는 형국이다.

손씨는 천등산 지등산 인등산에 둘러싸여 있는 한울선원에서 홍윤흥씨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세 산봉우리 위에 떠 있는 하늘에서 큼직큼직한 함박눈이 기도터 앞마당 쪽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육관 선생님,
이유야 어떻든 모름지기 지관은 돈과 멀리해야 합니다.
명당 아닌 곳에 흉사를 막을 수 있다 하여 부적 등을 권하면 얼풍수로 전락되고 맙니다.
어찌하여 당대 최고의 풍수가 그런 구설수에 오르내리는지요."

"그러게 말이오.
내가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보지.
예부터 풍수가 돈은 탐하면 시신의 노여움을 받아 비명횡사하거나 중풍 심장마비에 걸려 죽게 되지요.
잘못 하다간 내가 그 꼴이 되고 말겠구먼. 옛날에 말이오.
중국 땅에 증갈래라는 풍수쟁이가 살았는데 이 양반이 이런 말을 했어.
좋고 길한 땅을 구하려거든 반드시 양사(지리에 밝고 어진지관)를 찾아야 한다.
나 스스로 양사가 되어보려 마음을 고쳐먹곤 했건만 이렇게 구설수에 오르내리니 허참 딱한 노릇이구먼."

"육관 선생님, 이제 풍수로서 명성은 얻을 만큼 얻었으니 우리 이제 힘을 모아 민족의 정기를 고쳐 잡는 데 매진합시다.
단군을 섬기며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에 말입니다.
당돌한 말이오나 제가 관상은 좀 봅니다.
선생님 지금 이마 전체에 파도가 일고 있습니다.
말년에는 파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습니다. 감히 말합니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잠시 두 사람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손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가? 이제 이승과 이별할 시간이 온 건가?"

그 후 육관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민족관을 설립한다고 선언했다.
육관은 사망 직전, 경북 문경을 자주 찾았다.
홍윤흥씨의 말이다.
"문경 동로면 적성리 갈밭골에 천하 명당이 있다며 그곳으로 떠난다 해요,
몇번이나 풍수 일 그만두시라고 애원했지만 노인은 훌쩍 그곳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곳에 치마 바위라는 곳이 있는데..."

치마바위는 조선조 명대신 정도전과 관련이 있다.

정도전은 중국의 이름높은 풍수 두사충으로 하여금 자신의 묘터를 찾아달라 한다.
두사충은 이 바위 부근을 답사한 후 이곳은 연주패옥이로다, 라고 극찬한다.
연주패옥이란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이 허리춤에 차던 구슬을 일컫는 말로써 풍수세계에서는 이런 형국은 아주 높이 평가한다.
이 야화는 문경시에서 펴낸 향토지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두사충은 연주패옥 자리에 술잔 1개와 은 2백냥을 묻어 표식을 해놓는다.
두사충은 중국으로 떠나고 정도전을 죽었다..
청지기는 위치를 알고 있었다.
아들이 정도전 청지기와 함께 아비 묘터를 찾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청지기가 그 위치를 가리킬 때 그만 타고 온 말이 갑자기 대노해 청지기를 물어 죽인다.
이로써 연주패옥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세월이 흘러 손석우씨가 연주패옥을 찾아나서게 된 것이다.

손씨가 문경에서 명당터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장안의 명문집 부인들이 지관들과 함께 고급 승용차를 타고 내려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문경 사람들은 괜히 육관이 내려와 마을을 들뜨게 했다며 그를 탓했다.

이렇듯 손석우씨는 가는 곳마도 소란을 피우고 화제를 모았다.
유달리 풍수사상에 매료되어 있는 우리 국민성 때문에 육관은 본의 아니게 유력인사 대접을 받았다.
비록 말년에 좋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골머리를 앓았지만 그에게도 긍정적인 부분이 없진 않다.
보학 연구(족보)에 매진했으며 일제가 우리나라 명사에 박아놓은 단혈철주(쇠말뚝)를 뽑아야 한다며 민족 정기 바로 세우기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남의 묘터를 봐주기 위해 출장중 심장마비로 인해 죽게 된 손석우씨,
한울선원 홍윤흥씨의 말대로 문경 땅의 비밀을 캐지 않았더라면,
풍수일을 그만뒀더라면 그는 장수했을지도 모른다.
손석우씨는 생전에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풍수를 잘못 하면 지신으로부터 천벌을 받는다네, 나야 뭐...
지관으로서 올바른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하하하."

노인의 웃음은 참으로 호탕했다.
그러나 웃음 뒤에는 누구에겐가 쫓기고 있는 듯한 초조함도 없진 않았다.



육관의 마지막 예언 "우리나라의 앞날 운세는 매우 전도양양하다"

한편 손석우씨는 비록 믿거나 말거나 식이겠지만 우리 국민들에게 역술의 힘을 빌어 많은 용기를 주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앞날 운세는 매우 전도양양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하늘에 오경명성이라는 별이 있소. 그 별의 기운을 받는 나라는 늘 흥했습니다.
이 별은 천체의 자미국에 있어요.
왕성한 기운을 내뿜습니다.
오경명성이 지구를 비추기 시작한 것은 2천5백년 전인데 그동안 중국 로마 영국 독일 미국 일본을 비췄어요.
이 별의 기운을 받은 나라가 세계를 제패했지요.
륭한 인물도 많이 태어났구요.
우리나라를 이 별이 비추기 시작한 것은 1986년 가을부터인데 3백81년 동안 계속 됩니다.
그동안에 우리나라가 세계 인류를 이끄는 종주국이 될 겁니다."

풍수지리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이 세상을 떠난 육관도사 손석우씨.
그는 생명줄을 놓기 5년 전에 이런 예언을 하였다.

"98년부터는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면서 99년쯤 통일될 것이다.
어떤 논리에서냐?
풍수지리 사상에서의 천통일원 원리에 의해서이다.
2003년에는 남북한 통일 대통령이 나오는데 그는 현재 나이가 55세쯤 된 부드럽고 복을 타고난 남한 사람이다.

육관의 마지막 예언 "우리나라의 앞날 운세는 매우 전도양양하다"

한편 손석우씨는 비록 믿거나 말거나 식이겠지만 우리 국민들에게 역술의 힘을 빌어 많은 용기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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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나로 말하면 흔히 서양의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에 견주어 조선 최고의 예언자라 불리는 남사고(南師古·1509∼1571)라오. 호는 격암(格菴)이라 했고, 학문을 업으로 삼았으되 평생 유가(儒家)의 경전이라곤 그저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을 뿐, 그밖엔 온 마음을 쏟아 역학·풍수·천문·복서(卜筮)·관상 등을 즐겨 배웠고, 마침내 도통해 대예언가 소리를 듣게 된 거였지. 오늘날에도 ‘남사고비결’이니 ‘격암유록’이란 비결 책을 내가 쓴 것으로 다들 믿고 있다던데. 그야 어쨌든 내 예언은 항상 정확히 들어맞았소.1575년(선조8) 조정이 동서 양편으로 분당될 것을 난 미리 짐작했고, 뒤이어 임진왜란(1592)이 발생할 것도 진즉에 알고 있었소. 사람은 영물이라, 열심히 도를 닦아 이루지 못할 게 그 무어겠소? 풍수에 관심이 깊은 나는 조선8도의 명산을 빠짐없이 둘러보았고, 그 결과 미래까지 꿰뚫어보는 안목을 얻었다고나 할까.”
남사고는 정감록 산책을 함께하고 싶었는지 과거로부터 내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는 남사고 자신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해놨다는 이른바 십승지(十勝地)에 대한 설명이다. 남사고는 본래 십승지의 원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정감록에 얼마나 충실히 반영돼 있는지는 사실 미지수다. 십승지란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이며 복을 듬뿍 주는 길지(吉地)다. 남사고는 편지의 서두에서 예언서 가운데 가장 체계적으로 십승지의 문제를 다룬 ‘감결’의 성격을 논의한다. 노대가의 안광이 날카롭다.

●감결의 성격

“정감이 이심과 이연 형제와 더불어 방방곡곡을 유람하면서 조선의 국운을 예언한 대화체 예언서가 바로 ‘감결’ 아니겠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정감은 천문에 밝았고 이심은 아마 풍수에 정통했나 보오. 그런가 하면 이연은 세상사를 이모저모 따져 두 사람의 말을 보충한 것 같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세 사람이 금강산에서 유람을 시작, 삼각산을 거쳐 다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가야산에서 대화를 마친단 점이야. 서북쪽에도 묘향산, 구월산 같은 명산이 많은데 거기엔 발길이 전혀 미치지 않아. 이걸 보면 정감록은 서북지방을 버려진 땅으로 본 모양이야. 그와 대조적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을 몹시 중시하고 있어. 하긴 이 3두 산이 백두대간의 허리니까.

또 하나 재밌는 점이 있어.‘감결’은 역사상 한국의 수도가 평양, 송도, 한양, 계룡산, 가야산으로 옮긴다고 봤다는 점이지. 나라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한단 말인데, 남부지방이 한반도의 중심이란 이야기야. 그렇담 요새 행정수도를 공주 연기 쪽으로 옮긴다고 야단들인데 그도 그럴듯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어.

여하튼 말세엔 천지가 온통 전쟁, 질병, 경제대란, 환경파괴 등으로 한바탕 진통을 치르게 돼 있다고 하지. 바로 그때 십승지를 찾아가야 하는 거야. 십승지는 전쟁과 흉년이 들지 않으므로 지각 있는 사람은 당연히 십승지로 들어가야 옳겠지. 글쎄, 나도 알아. 십승지가 과연 특정한 공간이냐 아니면 어떤 특수한 정신적 단계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단 걸 말이지.”

●십승지의 으뜸 풍기 금계촌과 예천 금당동

십승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인 논쟁을 남사고와 벌이고도 싶지만 그는 내게 그럴 겨를을 안 준다. 대신 그의 편지는 십승지를 하나씩 직접 거론한다.

“이제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를 하나씩 소개해 보자고.‘감결’의 내용을 줄기로 삼고 그밖에 다른 예언서들도 참고한다면 설명이 제법 들을 만할 거야. 첫째가는 곳은 풍기(豊基)지.‘토정가장결’에서도 풍기를 피난처로 손꼽았어. 내가 쓴 걸로 돼 있는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菴山水十勝保吉之地)’에선 산수가 은밀한 태백·소백 두 산의 그늘이 남쪽으로 드리워진 풍기라고 했어. 풍기의 예에서 보듯 한국 최고의 길지는 태백산과 소백산에 포근히 안겨 있단 말야. 난 또 풍기의 길지를 기천(基川) 차암(車岩) 금계촌(金鷄村)이라고 좀더 자세히 밝혀놓기도 했어. 금계촌은 마을 북쪽에 소백산이 있고 산 아래 두 개의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이야.‘피장처’에도 역시 같은 말이 나오지. 물론 내가 지금 언급한 ‘남격암’ 등의 비결 책들은 모두 정감록의 일부야.”

풍기 금계촌이라면 나도 잘 안다. 이미 답사를 다녀온 곳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나의 답사 이야기를 할 겨를이 없다. 남사고의 설명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풍기 못지않은 곳이 예천(醴泉)이야.‘토정가장결’에도 예천이 나와 있지.‘남격암’에선 예천에서도 금당동(金堂洞) 북쪽이라고 제법 자세히 밝혔어. 그러고 보면 내 책이 다른 비결서에 비해 역시 가장 세밀해. 금당동은 사실 큰 길에서 가까워. 십승지로선 이례적인 경우인데 그래도 병란이 미치지 않아 여러 대에 걸쳐 평안을 누릴 만한 곳이야. 다만 임금이 이쪽으로 피난을 올 경우엔 화가 미쳐.”

아마도 남사고는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 봉화까지 피난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물론 엄밀한 의미로는 ‘남격암’을 남사고의 저서라 주장할 근거가 없고 그저 속설일 뿐이다.

●경상도의 십승지


백두대간의 모습을 담은 산경도.

남사고의 설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 십승지를 선정하는 1차적인 기준은 풍수다. 특히 백두대간 가운데서도 태백산 이남에서 길지를 구하고 있다. 십승지의 으뜸으로 손꼽히는 풍기와 예천은 행정구역상 경상도에 속한다. 둘째, 셋째, 넷째 그리고 여덟째 십승지도 역시 그러하다. 적어도 십승지의 절반은 경상도에 있단 말이다. 경상도는 퇴계 이황을 비롯해 큰 선비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라 세평이 좋아 그렇게 된 점도 있겠다.

“십승지의 둘째는 안동(安東) 화곡(華谷)이야.‘남격암’에선 화산(花山)의 북쪽에 이른바 소령고기(召嶺古基)가 있다고 했고 그곳은 내성현(奈城縣)의 동쪽, 태백산의 양지바른 곳이라고 토를 달았어.‘두사총비결’에선 그저 영가(안동)의 백운산이라 했고,‘토정가장결’은 그저 안동이라고만 썼는데,‘피장처’엔 경상도 내성현의 북면, 안동 북면 소라고기부 동쪽과 극히 양지바른 서쪽이라고 말했지. 비결 책마다 십승지의 설정이 꽤 다르게 돼 있군. 어느 쪽이 맞느냐 하는 문제는 단언하기 어렵지. 사람들 생각이 서로 다른 걸 어떡하겠어?

셋째 십승지는 개령(開寧)의 용궁(龍宮)인데, 어느 비결에도 자세한 설명이 없어. 아마 한때 각광을 받았지만 그 뒤론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나봐. 넷째는 가야(伽倻)라고.‘남격암’엔 가야산 밑 남쪽에 만수동(萬壽洞)이 있다며 그 둘레는 200리가량 되어 몸을 보전할 수 있지만 가야산의 동북쪽은 나쁘다고 했어. 만수동이란 이름은 사실 각지에 다 있었어. 만 살까지 살 수 있는 마을이라니 이름이 좋지 않아?

‘감결’이 여덟째로 꼽는 십승지 봉화(奉化)도 역시 태백산과 소백산에서 가까운 곳이지.‘남격암’도 봉화를 언급했어. 열 번째 십승지도 태백 즉, 태백산이라 했지만 강원도 쪽보다는 경상도를 중시한 느낌이고, 심지어 아홉 번째 십승지인 지리산도 전라도에만 속한 것은 아니거든. 이렇게 보면 십승지의 대부분은 경상도 땅에 있다고나 할까.”

●충청도의 십승지

“충청도엔 모두 세 곳의 십승지가 있지. 모두 소백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어.‘감결’이 다섯째로 언급한 단춘(丹春)이 우선 주목되네.‘남격암’은 단양(丹陽)군의 영춘(永春)에 있다고 했고,‘피장처’에선 춘양면의 땅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단양 가차촌을 거론하지. 깊고 기이하고 경치 좋은 곳이라는데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는 아무도 모를 거야.

여섯째 십승지는 공주(公州) 정산(定山) 마곡(麻谷)이야.‘남격암’은 공주의 유구(維鳩)·마곡 두 물줄기 사이로 보았지. 그 둘레가 백리나 되는데 전쟁의 피해를 면할 수 있다고 했는데 요즘 거론되는 신행정수도가 바로 이쪽이지. 명당이야!

그런데 말이야, 내 후배인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택리지’에 이런 말을 적어 놨더군. 무성산(茂盛山·공주의 서쪽 산)은 차령의 서쪽 지맥의 끝이다. 산세가 빙 돌며 마곡사와 유구역을 만들었다. 그 골짜기의 마을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이 많고, 논이 기름지며, 목화, 수수, 조를 심기에 알맞다. 사대부와 평민이 한 번 여기 들어와 살게 되면, 풍년과 흉년을 잊는다. 생활이 넉넉하게 돼 다시 이사를 떠날 염려가 적다. 대체로 낙토(樂土)라 하겠다는 거야. 그러면서 내 말을 인용했어.‘남사고는 십승기란 글에서 유구와 마곡의 두 강 사이가 병란을 피할 만한 땅이라 했다.’고 말이지. 내 십승기는 결국 유실됐지만 여하튼 난 십승지를 피난지로만 봤어. 그런데 이중환의 안목은 나보다 깊었던 거야.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단 말야.”

이중환은 1721년에 일어난 신임사화(소론이 노론을 무고한 사건)에 연루돼 유배형을 받았다. 그 뒤 그는 다시 등용되지 못한 채 평생 전국을 유람했다. 그의 책 ‘택리지’ 가운데는 십승지 가운데서도 유독 유구와 마곡에 관해 상세한 설명이 있다. 이중환은 기후가 좋고 물산도 풍부해 양반은 물론 평민까지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그 지역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밖에 일곱째 십승지는 진천(鎭川)의 목천(木川)이야. 역시 백두대간의 한 마디지. 그런데 말이야, 다른 비결 책들엔 목천에 대한 설명이 조금도 없어. 이처럼 십승지라 해도 사람들의 선호도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어.”

남사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른바 십승지란 것은 일정하게 고정된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보기만은 어려운 것 같다. 다음 기회에 좀더 알아볼 생각이지만, 비결 책마다 십승지에 준하는 수많은 명당이 열거돼 있다.

●전라도의 십승지


지리산 청학동도.

“전라도 땅에 있는 십승지는 하나뿐이야.‘감결’이 아홉째로 언급한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이 그거지.‘남격암’엔 이를 지리산이라고도 했고 더욱 구체적인 설명도 나와 있어. 운봉 땅 두류산 아래 동점촌(銅店村) 백리 안은 오래오래 보전할 수 있는 땅이라고 말이야. 이곳에서 장차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들이 연달아 나온다고도 했어.‘토정가장결’에서도 운봉의 두류산은 지형이 기이하고 아름답기가 궁기(弓其)만은 못해도 편안하고 한가로이 몸을 보전할 수 있다고 했어. 궁기란 나중에 말하겠지만 한국 최고의 명당인데 지리산은 그 다음이란 뜻이야. 내가 사랑하는 후배 이중환도 지리산을 극찬했어.”

내가 택리지를 살펴보았더니 이중환은 이렇게 말했다.“지리산은 남해 가에 있는데, 백두산의 큰 줄기가 끝나는 곳이다. 그래서 일명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蓬萊)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瀛洲)라고 하는데 이른바 삼신산이다.” 이중환에 따르면, 사람들은 지리산에 태을성신(太乙星神·하늘 북쪽에 있어서 병란, 재화 및 생사를 다스리는 신령한 별)이 산다고 믿었다. 그밖에 여러 신선들이 그 산에 모인다고도 생각했다. 지리산은 계곡이 깊고 크며 땅이 기름진 데다 골짜기의 바깥은 좁으나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넓어지기 때문에 백성들이 숨어 살며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다. 산속 깊은 데서도 농사가 잘 돼 승속(僧俗)이 섞여 산다는데 별로 애쓰지 않아도 먹고 살기에 문제가 없단다. 이중환은 지리산 사람들은 흉년을 모르고 살므로 아예 그 산을 부산(富山)이라고 불렀다.

지리산을 백두대간의 종착점으로 인식한 점에서 이중환의 생각은 ‘정감록’의 지리관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중환은 정감록에 미처 언급되지 못한 중요한 사실도 거론했다. 사람들이 지리산을 신성한 산으로 여겼다는 점, 그리고 지리산 주변의 경제 여건이 좋다는 점 말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난세에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택리지’의 설명은 이어진다.“지리산 남쪽에 화개동(花開洞·악양동의 동남)과 악양동(岳陽洞·지리산 남쪽 섬진강변)이 있다. 두 곳 모두 사람이 사는데 산수가 아름답다. 고려 중엽에 한유한(韓惟漢)은 이자겸(李資謙)의 횡포가 심해지자 화가 일어날 것을 짐작했다. 관직을 버린 채 그는 가족을 이끌고 악양동에 숨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찾아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한유한은 끝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도 신선이 돼 가야산과 지리산을 왕래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선조 때 한 스님이 지리산의 바위틈에서 종이 한 장을 주웠는데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동쪽나라 화개동은 병 속의 별천지(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신선이 옥 베개를 밀고 일어나 보니 이 몸이 이 세상에서 벌써 천년을 지냈구나(仙人推玉枕 身世千年).” 이중환의 말로는 그 필적이 최치원의 것과 동일했다 한다. 남사고 역시 내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이중환은 신선의 땅 지리산에서 최고의 복지로 만수동(萬壽洞)과 청학동(靑鶴洞) 두 곳을 손꼽았지. 만수동은 조선후기에 구품대(九品臺)로 알려진 곳이요, 청학동은 매계(梅溪)란 말야.18세기부터 조금씩 사람들이 출입했던 것 같아. 그런데 지리산 북쪽도 나쁘지 않아. 경상도 함양 땅인데 그곳의 영원동(靈源洞·지리산 반야봉 북쪽), 군자사(君子寺·함양군 마천면 군자동) 그리고 유점촌(鍮店村)을 일찍이 난 복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

●도계(道界)를 뛰어넘은 십승지

지리산에 관한 이중환과 남사고의 설명을 음미해 보니 지리산을 전라도만의 십승지라고 주장하기는 어렵겠다. 만수동, 청학동 등의 지명은 누구도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군자사 등은 행정구역상 엄연히 경상도 땅이었다. 사실 지리산은 조선시대에 전라 경상 2도에 걸쳐 있었으므로, 도계를 초월한 십승지로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따지고 보면 지리산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의 가장 큰 마디인 소백산도 그러했다.

특정한 지역이 과연 십승지가 될 만한가 하는 문제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곳이 백두대간에 속한 명산이 빚어놓은 명당이냐 하는 것이었다. 십승지에 대한 남사고의 설명은 다음회로 이어진다.

(푸른역사연구소장)

[저작권자 (c) 서울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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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게서 길에게로]마음을 씻고, 마음을 열고

ㅇ선생님. 고교 시절 은사이신 선생님께서는 신춘문예로 등단하신 시인이셨습니다. 우리 학교로 부임하시기 전, 선생님께서는 덕산에서 첫 교편을 잡으셨고, 그때의 기억들은 [덕산에서]라는 시편에 녹아 있었지요. 진흙에 떨어뜨려 발 뒤꿈치로 비벼 돌리면 다시 광채를 되찾는 동전 이야기를 노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부터 덕산은 제 마음속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또 덕산으로 갑니다. 비록 세월은 무심히 흘렀고, 동전은 다시 빛을 잃었지만....


서산 마애삼존불과 보원사터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다 운산나들목에서 빠지면 한반도의 오장육부 내포땅이다. 비산비야의 내포는 봄조차 느긋하기만 하다. 고풍저수지 뚝방길로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오르고, 느린 물결 위로 바람은 또 어디론가 길 떠날 채비를 한다.


그 호젓한 저수지 길의 끄트머리쯤 돌무지 위에 홀연히 미륵이 서 있다. 마치 이곳이 바로 마애삼존불이 사시는 강댕이골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처럼. 그리 길지 않은 산비탈을 타고 벼랑끝에 오르면 옹삭한 전각 안에 돋을새김한 세 분의 부처님이 계신다.


신라에 석굴암 대불이 있다면, 백제엔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 석굴암 대불이 엄숙함과 완벽성으로 대하는 이의 마음을 어렵게만 한다면, 서산마애삼존불은 흉금없는 이웃처럼 친숙하고 소박한 표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더없이 편안하게 해준다. 안타깝기로는 두 곳의 부처님 모두 전각 안에 갇혀 지내신다는 사실이다. 문화유산을 길이 보존하려는 취지야 탓할 바 아니지만, 나는 보호라는 명분 아래 격리되고 유폐된 모든 문화재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지 하고 혼자 생각해보곤 한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 불면 바람에 스치며 자연 그대로 있다가 서서히 소멸해버리는 것 또한 이치와 섭리에 맞는 일이지 않겠는가.


그 해맑은 '백제의 미소'를 되살리기 위해서 장대 끝에 갓등을 달아 여기저기 비춰주던 자원관리인 성원 할아버지는 이제 연로로 물러 앉으셨다. 지금 잠시 이곳에 머물며 그 일을 잇고 있다는 젊은 명정 스님은 몰려온 답사객들에게 마애삼존불에 대한 설명을 끝내며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은 석공의 솜씨를 보러 오신 게 아닙니다. 저 미소 속에 담긴 부처의 마음을 담아가셔야 합니다."


마애삼존불에서 내려와 골짜기 안으로 좀더 들어가면 넓다란 분지 위에 자리잡은 보원사터가 나온다. 폐사지가 이렇게 아늑할 수도 있다니. 조붓한 시냇물을 건너 소풍길처럼 다정한 오솔길을 따라 걸어들어간다. 오층석탑과 탑비 몇 기만 남긴 채 텅 비어버린 절터에 제법 무르익은 봄이 모르는 체 들어앉아 있다. 절터에 잇대어 있는 폐농가에서 뒤돌아보니 개울 건너 산자락에 산벚꽃이 한창이다.


잠시 몽롱해진 내 시야로 이번에는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젊은 연인 한 쌍이 걸어들어온다. 젊음은 폐사지에서도 아름답다. 덧없는 봄빛보다도 아름답다. 부러운 나의 마음은 문득 흘러간 청춘을 그리워했다.


TIP 보원사터를 지나 가야산 쪽으로 나아가면 옥양봉 아래 남연군묘가 있다. 대원군은 2대 천자(天子)가 나올 명당자리라는 지관의 말에 따라 그 자리에 있던 가야사를 불태워버리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 그렇게 해서 대원군은 아들과 손자를 왕위에 올렸지만, 그때부터 국운은 기울었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2대 천자 배출의 소임을 다한 명당은 지금 무슨 허울로 남아 있으며, 그곳에 누운 이의 심사는 과연 어떠할지. 또 한 가지. 비기(秘機)는 아니지만 남연군묘 부근 산자락에 현대의 명지관이라는 육관도사가 묻혀 있음을 나는 굳이 알리지 않겠다.



수덕사, 추억은 사라지고
내포들 한가운데 어렵사리 솟은 가야산 자락 밑으로 지구유(地球乳) 덕산온천이 있다. 제법 많은 시설이 들어서고 개발의 바람은 계속되고 있지만, 덕산온천 일대는 그렇게 번잡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들판과 산자락에 드문드문 온천장들이 들어선 탓인데, 비철이면 오히려 쓸쓸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나는 세상살이에 지쳤을 때 어김없이 덕산온천에서 하루이틀 묵어가곤 했다. 상처입은 학을 치유해줬다는 온천물에 심신을 달래고, 석문봉으로 수덕사로 그렇게 소일하다보면 찌든 살갗을 뚫고 활기가 소리없이 움트곤 했다.


그렇지만 수덕사는 갈 때마다 조금씩 나를 실망시켰다. 처음 수덕사를 찾았을 때 오래된 여관과 밥집 한두 군데만 낀 솔밭길은 얼마나 그윽했던가. 산등성이에 올라탄 정혜사의 처마를 바라보며 절마당에 올라서면 발밑으로 펼쳐지는 내포들은 또 얼마나 아늑했던가.


이제 난장에 가깝게 들어선 사하촌(寺下村)으로도 모자라 절 입구는 항시 포클레인의 소음으로 가득하다. 3대 비구니 사찰의 하나인 이 유명한 절은 몇십억원짜리 건물을 짓고 허물기를 부처님 손바닥 뒤집듯이 했다. 그러는 사이 덕숭산을 감싸던 경허와 만공의 법력은 희미해져가는 듯했고.


이번에도 영락없이 수덕사는 나에게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늘 밑에서 인고와 기다림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수덕여관의 안주인 박귀희 할머니는 3년 전 세상을 떴고, 뜨락에 복숭아와 나리꽃 가득하던 초가 여관은 폐가가 되었다. 군(郡)에서 어떻게든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거라고 했지만, 할머니 없는 수덕여관이 다 무슨 소용일 것인가.


가스통 나뒹구는 쓸쓸한 여관 앞마당에 고암 이응노의 이끼 낀 암각화만 어둑하게 놓여 있었다. 생전의 고암은 "이 암각화 안에 삼라만상의 영고성쇠가 다 들어 있다"고 했다는데.


TIP 수덕사에서 만공 스님의 법력이 서린 정혜사까지 오르는 길은 1,020단의 돌계단으로 이어진다. 이 만만치 않는 계단길을 오르기 힘겹다면 만공의 비결을 흉내내볼 필요가 있다. 일찍이 만공이 다른 스님과 더불어 산길을 가는데, 그 스님이 지쳐 더는 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만공은 마침 밭을 일구는 화전(火田) 부부를 발견하고는 다짜고짜 그 부인네를 껴안고 입을 맞춰버렸다. 당연히 노발대발한 남편이 쇠스랑을 들고 죽여라 덤벼들었고, 스님과 만공은 죽어라 달음질을 쳐 험한 산길을 훌쩍 넘을 수 있었다.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깔고 자면서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을 외쳤다는 만공다운 일화이지만 그 흉내를 냈다가 뺨을 맞고 안 맞고는 순전히 당신 다리힘에 달려 있으니 부디 잘 판단하시기를.


해미읍성 지나 개심사로

수덕사를 돌아 다시 운산쪽으로 길을 잡으면 이름도 아름다운 해미(海美)읍이 나온다. 비록 옛날 읍이라고는 하지만 작은 시골마을에 불과하니, 지금은 비어버린 해미읍성이 그나마 마을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진다. 조선시대의 읍성 중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해미읍성은 한때 이순신 장군이 군관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여름이면 담쟁이넝쿨 울울한 진남루로 들어서면 탁 트인 초원이 펼쳐져 눈맛을 시원하게 한다.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복원된 관아로 가다보면 홀연 키가 훌쩍한 범상치 않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600년 묵은 회화나무로 이곳에서는 '호야나무'라고 부르고 있는 이 나무는, 순교의 시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현장이다. 병인양요에 이어진 천주교 박해 때 숱한 신도들이 이 나무에 매달려 죽어갔다.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서 처형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호야나무 그늘 아래서 순교하지 못한 나는 잠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씻는다. 그대 애달픈 믿음의 넋들이여. 바닷길 끊긴 해미의 하늘 위로 그저 종달새처럼 솟구쳐 오르기를.


길은 이제 이국적인 목장길을 따라 개심사로 이어진다. 삼화목장. 개발의 시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었던 전 국무총리는 난데없는 목장 개발계획을 들고 나와 조선시대 12진산(鎭山)의 하나였던 상왕산의 울창하 던 숲을 베어내고 6백38만 평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목장을 만들어버렸다. 그 꿈의 목장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정축재재산의 환수라는 절차를 거쳐 지금의 농협 한우개량사업소가 되었다. 그 연유야 어떻든 4월 중순 무렵이면 어김없이 하얀 꽃을 피워 올리던 목장길의 벚꽃터널은 여전하지만, 이 나라를 휩쓸었던 구제역의 여파 때문에 지금은 개방하지 않으니, 그저 곁눈질로 탐미하며 지날 수밖에.


이나저나 세심동에 이르면 마음을 씻어야 한다. 솔향 그윽한 산길을 따라올라 외나무다리 놓인(이번에 가 봤더니 준설공사를 위해서인지 연못의 물을 빼놓았고, 외나무다리는 치워져 없었다) 경지(鏡池)를 건너 개심사 안양루 옆 나즈막한 해탈문에 이르면 이번에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러나 어쩌랴. 아무리 옷깃 여미어도 경내에 가득한 봄꽃들과 눈길 마주치면 마음은 그냥 스르르 풀리고 마는 것을. 범종루와 심검당, 자연목의 곡선미를 살린 기둥들, 대웅보전 처마기와들 버티고 선 도자기 연봉들, 명부전의 역사상(力士像)의 의기에 찬 고함조차 모두 꽃으로만 보이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은 나에게 어림없는 일이고, 이 봄 다 가기 전에는 피안의 문턱조차 밟기 애당초 틀렸다.


TIP 서산은 박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초가지붕 위로 보름달처럼 탐스럽게 열리던 박의 모습은 이제는 찾아볼 길 없지만, 운산의 이웃마을 탑곡리에 박을 이용한 민속놀이인 '박첨지놀이'가 남아 있다. '떼루야 떼루' 하는 느려터진 충청도 특유의 후렴구로 이어지는 이 꼭두각시 놀음은 너무도 순박하고 시골스러워서, 어쩌면 개그와 개인기로 넘쳐나는 세상에 별 흥미를 끌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꼭 보고 싶다면 정기공연을 알아보거나, 20명 이상 단체를 이루어 가면 실비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또 서산박은 이 지역의 별미인 박속밀국낙지탕의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편집회사 투레 대표〉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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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momos25/20011345988

충남 서북부에 있는 서산시(瑞山市)는 동쪽은 당진군·예산군, 남쪽은 홍성군, 서쪽은 태안군에 접하고, 북쪽은 아산만에 면한다. 금북정맥이 서산 북부를 동서로 지나고, 동남부에는 서산의 최고봉인 가야산(伽倻山·678m)을 중심으로 삼준산(三峻山·490m), 석문봉(石門峰·653m), 일락산(521.4m) 등 400~600m급 산들이 솟아 가야산군을 이룬다. 서부에는 금북정맥의 금강산(316m)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지맥을 뻗었다. 북부 지맥엔 연화산(蓮花山·234m), 팔봉산(八峰山·361.5m), 망일산(望日山, 302m)을 비롯한 150m 내외의 낮은 산지가 곳곳에 구릉지를 이루고 있고, 남부는 도비산(島飛山·352m) 등 낮은 구릉성 산지가 뻗어 각각 가로림만과 적돌만으로 태안반도와 내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가야산권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해발고도 100~3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들이 곳곳에 분포되어 완사면과 구릉지들이 있을 뿐, 큰 하천과 퇴적평야의 발달은 미약하다. 금북정맥 분수령을 중심으로 북부에는 40여 개의 소규모 하천이 곳곳에 산재해 인근 곡창지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대교천이 남서류하며 시 중앙을 적시며, 가야산 남쪽에서 발원한 해미천과 만나 간월호로 흘러든다.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굴곡이 심하며, 조석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수심이 얕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하나인 치리국국(致利鞠國)과 신소도국(臣蘇塗國)이 지금의 지곡(地谷)과 태안(泰安)에 있었다. 백제 때는 기군(期郡)이라 불렀고, 속현으로 성대혜현(省大兮縣·지금의 태안)과 지육현(知六縣·지금의 지곡)을 두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부성군(富城郡)이라 개명하였고, 성대혜현을 소태현(蘇泰縣)으로, 지육현을 지곡현(地谷縣)으로 고쳤다. 오늘날의 서산시 지역은 고려시대의 지곡현 땅이었다. 고려 인종 때 부성(富城)에 현령을 두었다가 읍치(邑治)를 지곡에서 오늘의 서산시로 옮겼다. 1284년(충렬왕 10) 다시 복군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안군·서산군·해미현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모두 합쳐 서산군이 되었다. 1989년 서산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서산은 서산시와 서산군으로 나누어졌고, 태안군은 서산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1월 서산군과 서산시가 다시 서산시로 합쳤다.

2004년 현재 대산읍과 석남동·부춘동·동문동·활성동·수석동 및 지곡면·팔봉면·성연면·음암면·해미면·고북면·인지면·부석면·운산면의 1읍 5동 9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739.46㎢, 인구는 15만136명(2004년 현재)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고구마·콩·참깨·인삼·마늘·생강 등이다. 특히 마늘과 생강을 많이 생산하는데, 서산육쪽마늘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낮은 구릉지는 목축에 알맞아 대규모 농장이 많다. 주요 수산물로는 갈치·민어·농어 등의 어류와 꽃게·굴을 비롯한 각종 조개류가 많이 잡힌다. 간월도의 어리굴젓은 서산의 특산물로서 맛과 향기가 좋다.

리아시스식 해안의 여러 만(灣)과 금북정맥의 가야산군이 가로막아 지리적으로는 교통이 불편한 편이었으나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면서 수도권과의 연계가 편리해졌다. 당진~서산~태안을 연결하는 32번 국도가 시를 동서로 관통하고, 대산~서산~해미~홍성을 잇는 29번 국도가 남북을 관통한다. 가로림만과 천수만이 가로막긴 해도 각 면 단위로 지방도가 잘 나있어 자체 교통은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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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삼존불상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 계곡 층암절벽에 새겨진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국보 제84호)은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잎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에서 당시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보원사지

운산면 용현리 보원 마을에 있는 절터. 보원사(普願寺)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요즘은 백제 때의 절로도 보고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다.

10세기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조(石槽·보물 제102호)와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103호)·5층석탑(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제105호)·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제106호) 등의 유물과 초석이 남아 있다. 1968년에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9.5㎝)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7.5㎝)이 발견되었다. 사적 제316호.

개심사

운산면 신창리에 있는 개심사(開心寺)는 649년(백제 의자왕 9)에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1475년(조선 성종 6) 불탄 것을 1484년에 중건한 뒤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보물 제143호)과 명부전·팔상전·심검당 등이 남아 있고,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4호)이 보관되어 있다.  건물 배치는 조선 초기의 배치법을 따르고 있으며, 건축 양식은 다포계(多包系)·주심포계(柱心包系)·익공계(翼工系)의 형식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현재 건물은 고쳐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개심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과 대비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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