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 강희창 시인 홈페이지




















  qqpp(2006-01-17 09:22:47, Hit : 8507, Vote :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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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향 내포에 가다 (2003년)




* 저의 고향마을-홍성 수릿골 동리가 수레바퀴처럼 동그랐다하여 한때
   車洞이라 불리기도하였음, 冠巖山 밑에 부모님 산소, 우리집터
   사촌 큰형님 집이 보이네요. 관암산을 중심으로 쌀개바위, 산제당, 언진바위,
   사진의 좌측으로 산능선을 따라 시오리가면 덕숭산 수덕사가 나온답니다

   원래 기억대로라면 저 집들중에 기와집이 둘 뿐이었는데....
   제가 쥐불놀이 썰매타며 연 날리던 저 들판, 제 유년의 뜨락이지요  
   170년 정도된 종가집-큰 댁도 헐렸더라구요



==참초하러 고향에 가다==
....................................

저는 충남 내포뜰 홍성 구항면 화리 수릿골에서 태어나 열다섯살 먹던 해
서해대교 건너편 당진군 合德邑 내동 잔다리 외가댁 근처로 이사를 갔걸랑요

부모님 두분은 제가 25살, 35살나던해 각각 돌아가셔
고향인 수릿골 선영에 묻혀게시답니다

2003년 8월 황금 연휴를 이용해 고향 홍성엘 갔었습니다.
아들 필립이 데리고 금초, 벌초하러....
친지들 모여보니
이제 내 항렬도 반은 떠나시고 몇 안남았더군여

덕숭산 수덕사 고랑에서 떵떵거리며 잘나갔다던 수릿골 강씨 집안도
5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해방 이후부터 주눅들고 흩어지고...

이제 다들 떠나고 74세의 종손 형님(2012년 작고) 한분 그 땅-볼프강 유년의 땅을
쓸쓸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내가 태어난 뿌리를 더듬어 보고 족보를 꺼꾸로
짚어가며 내가 있기 까지 전설을 짚어보았답니다

本은 진주 姜, 시조는 고구려때 강이식 장군이시고 은열공 강민첨 장군파
사맹공조 26대손이랍니다

위 7대조께서 정착했던 溫陽땅 동화리를 떠나 洪城 갈산땅에 첫둥지를 틀고
한말에 증조부(德자 善자)께서 강화부 정족산성 史庫參奉으로 공직에
몸을 담으시고 일제때는 덕숭산 修德寺에 공양하며
만공스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오시기도하고
큰 증조부가 훈장이시던 수릿골서당에 어린 백야 김좌진 장군이
한문 배우러 다니시고.....

이젠 어르신네들 구전에나 듣는 그 동네 우리 집안 내력들...
볼프강 살던 토방집은 허물어 고추밭으로 있었구요

선산 16기묘를 새벽부터 비맞아 가며 벌초하다 생각해보니
불과 몇 년이면 이렇게 할 사람도 없겠구나 싶더군요
막막하더이다....나야 화장하면 그만이지만.....

아들놈은 이제서야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가 여기라고 제대로 아는지 어떤지....

끝나고 느즈막에 어릴때 물놀이, 불싸움놀이 하던 와룡천臥龍川 건너
갈산葛山의 白冶 김좌진 장군 생가와 그 옆 결성의 卍海 한용운님 생가에 들렀다가
서해대교 타고 후딱 올라왔답니다
서해대교는 제가 2000년도 1년을 온전히 바쳐 이벤트 총감독으로 임했던 애착이 많은
기념물이랍니다

이제 찬바람에 퇴락이 몹시도 싫어지는 추운 가을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저 스스로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동장군은 너무너무 싫거든여

* 하시는 일 잘 마무리 하시고  
  님들, 올 가을걷이, 결실의 성찬을 계획해 보셔유!!!! (2003. 8.22)






뒤에 큰 산은 홍주성의 진산 백월산의 뒷모습입니다







*  덕숭산 수덕사(정혜사)에서 바라본 고향뜰 / 용봉산-백월산-오서산이 보입니다
   들판 한가운데로 와룡천(신천내깔)이 흘러 가까이 서해바다 간월호수 천수만 쪽으로
   빠지는게 보이구요
   들판 끝쪽 좌우엔 백야생가, 만해생가, 성삼문생가 그리고 사진 좌측 바깥쪽에는
   덕산온천, 윤봉길생가, 남연군묘.....

   우측으로 뻗어가는 줄기는 금북정맥 가야산 지류인 갈산지맥으로 삼존산 그리고
   가곡국민핵교 뒷산 명덕산, 그 기슭에 진주강씨 선영이 보입니다
   가운데 백월산 우측이 고향 마을- 용봉산 앞 들판으로 내포신도시가 들어서고
   충남도청이 옮겨온다네요







* 공리 : 백제 때는 결기군(結己郡)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결성군(潔城郡)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결성군(結城郡)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엔 결성현(結城縣)에 속했다가 조선 말엽엔 결성군(結城郡) 화산면(花山面)의 지역이었다.

조선 때 공수전(公須田)이 있었으므로 공숫골 또는 공수동(公須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공리(上公里) 하공리(下公里) 죽두리(竹頭里) 벌리(伐里) 화리(禾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공리(公里)라 하고 홍성군(洪城郡) 구항면(龜項面)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하공, 수릿들, 대머리, 공수동 등이 있다. 하공은, 새뜸이라고도 부르는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붙은 이름이다. 수릿들은,  높은 산 아래 마을이 있다해서 붙은 이름이며, 수릿들, 수레들, 차동(車洞), 화리(禾里)라고도 부른다. 대머리는 대숲이 많았던 마을이라 하여 죽수(竹藪), 죽두리(竹頭里), 죽촌(竹村)이라고도 부른다.  공수동(公須洞)은, 조선 때에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던 마을이라 공수동(公須洞) 또는 공숫골이라고 부른다. 공리라는 명칭도 여기서 생겼다.

* 언진바위 : 충청남도 홍성군의 구항면 공리(公里) 수레골, 차동 에 위치한 바위이다. 언진바위는 바위 위에 바위가 얹어 있다 하여 언진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바위의 이름이 언진바위가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아기를 갖지 못한 아낙네들이 이 바위에 찾아와서 돌을 던졌을 때 그 돌이 바위 위에 올라가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이다.



[출처] 공리 | 두산백과


*** 아래 댓글들은 홍성출신 고스트라이터 송우(宋祐) SONG Woo (2001년 작고)님의
     어머니 자전기-달님의 이야기   에서 따온 글들과 내포 관련 수집 자료임
      http://user.chol.com/~songwoo/swihp013.htm



qqpp (2006-03-01 21:06:12)  
<*embed src="http://urikr3.com/music/classic/uri_c0123.asf" autostart="true" hidden="true" loop="-1">.
qqpp (2006-08-26 15:18:57)  
갈산면 / 면적 54.35㎢, 인구 5,446명(2001)이다. 동쪽으로 구항면(龜項面)과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남쪽으로 결성면(結城面), 북쪽으로 서산시 고북면(高北面), 서쪽으로 황해에 접한다. 16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대체로 낮은 구릉과 평지를 이루며, 북동부 경계부에 최고점 490m의 산지가 남북 방향의 줄기를 이룬다. 예산군 덕산면에서 발원하는 와룡천(臥龍川)과 서산시 고북면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각각 쌍천리(雙川里)·운곡리(雲谷里)·상촌리(上村里)를 거쳐 행산리(杏山里)에서 합류하여 결성면으로 들어가서 천수만(淺水灣)으로 흘러든다. 와룡천 연변에 원안들·창들·한들·장땡이들 등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이들 평야는 땅이 비옥하여 쌀 생산이 많고, 채소류 재배가 활발하다. 충청남도·충청북도 서부의 중심지인 홍성·서산을 연결하는 도로가 지난다.
qqpp (2006-08-26 15:20:22)  
운곡리-대기티(일본이 맥을 끊오놓은...)
모양이 봉처럼 새겼다 하여 봉두산이라 부르는 산 밑에 있는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가우터, 운정, 노양, 방곡, 대기티, 도정, 원동, 조실 등이 있다. 운정은 운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큰 우물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방곡은 운정 북쪽에 있는 마을로 운정과 방곡의 이름을 따서 운곡 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11 (2006-08-26 16:47:54)
공포의 하고개 /

이 험한 고개를 넘을 때는 나나 나 또래의 1학년 신입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공포심(恐怖心)에 벌벌 떨며 숨가쁘게 고개를 오르자 마자 눈을 감고 허겁지겁 내려와야 했다. 전쟁이란 황야(荒野)와 같은 들판에서 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대개는 험산(險山) 준령(峻嶺)을 경계로 피차(彼此) 대치하거나 조망(眺望)하며 전투를 한다. 우리나라 남북정쟁사에 깊은 상처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 '피의 능선'이 그렇다. 얼마나 많은 군인들의 피가 흘렸으면 이름마저 '피의 능선'이라 했을 가.

하고개도 그런 고개였다. 6.25사변 때에 구항 쪽에 있는 군인들과 홍성 쪽에 있는 군인들이 서로 고개를 넘어 홍성이나 구항을 차지하려고 무던히 뺏고 뺏기던 고개였고, 그로 인하여 수많은 주검의 지세들이 널려 있던 곳이다.

전쟁은 묘(墓)가 아니라 무덤이다. 죽어 간 자의 명복을 비는 마지막 봉분(封墳)을 만들 여유가 없다. 그저 죽은 대로 시체를 거리에 내버려두거나 살아 남은 자들이 쓸어 모아 흙구덩이를 파고 묻어 무덤을 만들면 그것으로 끝이다.


도깨비와 귀신과 원혼의 심포니와 오페라

하고개의 고갯마루에서 차도는 또 왼쪽으로 구불구불 아래로 내려간다. 사람들이 내려가는 지름길은 오른쪽 산비탈 아래에 있다. 경사는 올라오는 길보다 더 급해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미끄러지기 쉽고, 북사면을 이루고 있어 항상 그늘이 진 응달이다. 이곳 산비탈에 그런 떼주검의 무덤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덤은 비와 눈과 바람에 파헤쳐져 눈이 왔다가 녹거나 폭우(暴雨) 또는 소낙비가 심하게 오는 날이면 땅에 묻혔던 주검들의 팔 다리 해골(骸骨) 뼈들이 흘러 내려 왔고, 한 동안 그런 주검의 잔해들이 거리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청소년에게 희망은 꿈이고 주검은 질겁이다. 우리는 이 고갯마루를 넘을 때면 항상 겁을 먹고 달리다 싶히 내려갔고, 그럴 때면 뒤에서 귀신(鬼神)이 쫓아오는 환상(幻想)과 공포(恐怖)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남북 전쟁의 원혼(泻魂)들과 귀신(鬼神)과 도깨비들이 모여 때로는 구슬픈 트리오를 부르고, 때로는 천지가 진동하는 아우성을 지르고, 때로는 지나는 사람들의 뒤에 말없이 소복(素服)을 입고 나타나 따라오는 고갯길로 알려져 있었다.

여간 무서운 고개가 아니었다. 실제로 이 고개를 넘다가 놀라 나자빠진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넘던 하고개의 옛길은 세월의 흐름에 다 없어지고, 자동차도 제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던 하고개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신나게 달려 단숨에 오르고 단숨에 내려간다. 그 옛날, 이 무섭던 하고개의 사연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쟁! 그 때만해도 전쟁의 상흔(傷痕)은 이렇게 여기 저기에 남아 있었다.


비목(碑木)

이 고개를 아침저녁으로 넘어야 한다. 아침에는 해가 뜨는 시간이고 학교에 가는 길이라 그래도 좋았다. 학교가 늦게 끝나 어둠이 깃들 때에 이 고개를 다시 넘어 집으로 오려면 정말 몸이 오싹했다. 때로는 귀신이 나올 것 같이 고개 밑에 주저앉아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사람이 먼저 가게하고 뒤에서 숨을 죽이며 따라 넘기도 했다. 집에 오면 먼길을 걸어오느라고 힘이 들어 늘 다리와 발이 부었다.

세월이 지났다. 내가 이 고개를 넘어 학교에 다니던 때로부터도 40 여 년이 지났다. 이제는 남북이 제 정신을 차려 화해와 통일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 대를 기하여 이름 모를 사람들, 사상(思想)이 무엇인지, 그 사상의 도구로 동족 상잔의 아픈 역사의 골목에 죽어간 이 고개의 원혼들을 달래기 위하여 비목(碑木)이라도 하나 세워 주고 싶다.
qqpp (2006-08-26 17:02:59)  
수덕사 가는 길

본격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찌 하다 시작한 거리의 쌀 장사로 봄 여름 가을을 보내다 보니 온 산에 붉은 단풍이 들었다. 달님은 수덕사가 생각났다. 걸어서 한 시간 반 정도 가는 거리이다. 부처님께 봉양(奉養)할 귀하고 귀한 좋은 찹쌀 몇 되를 고르고 골라 옥양목 새 자루에 넣어 정성스럽게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섰다.

관자리에서 5리 정도 되는 돌피를 지났다. 돌피는 멀지 안은 친척 큰 동세가 살던 마을이나 그 때는 고북으로 이사를 갔을 때다. 관자리에서 돌피까지 가는 길은 지금은 가곡천이라고 부르는 쌍천 냇물을 보로 막아 동산리 한들까지 농경수로 쓰는 조그마한 수로가 있었다. 가을이라 대지가 말라 뽀송뽀송한 길이 겨울을 준비하는 잡초들 가운데에 빠끔하게 뚫려 있었다.

그 때에 수덕사를 가려면 돌피에서 앞 내를 건너 구성굴로 가야 했다. 맑은 물들이 고운 모래 고운 자갈 위로 흐르는 냇가에는 크막한 돌로 만든 징검다리가 있었다. 달님은 곱게 빨아 신은 버선에 물이 들어갈세라 사쁜 사쁜 돌 징검 다리를 선녀처럼 건너 구성굴로 갔다. 구성굴은 밤나무 밭이 많아 가을을 맞아 영글고 벌어져 떨어진 진한 갈색의 밤 알과 밤 송이들이 무수히 땅에 떨어져 있었다.

"남의 것은 처다도 보지 마라."

호랑이 처럼 무섭던 친정 아버지 강병달의 교훈이다. 달님을 땅에 떨어진 먹음직스런 알밤에는 일부러 눈을 피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구성굴을 지났다. 구성굴을 지나면 복당리가 나오고, 복당리를 지나면 낙상리가 나오며, 낙상리를 지나면 천년(千年) 고찰(古刹) 수덕사가 나온다.


이응로와 수덕여관과 새여인

노송(老松)이 가을 바람에 소리를 내며 스산한 몸짓을 하는 사이로 빠알간 단풍들이 저 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듯 곱게 달아 있었다. 노송 지대를 지나면 왼쪽에 수덕여관이 있다.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畵伯)이 살던 집으로 본처(本妻)가 살고 있고, 이응로는 그 때 새 여인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수덕 여관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수덕사 고찰이 있고, 그 위에 대웅전(大雄殿)이 삼라만상(森羅萬象)을 굽어보며 우뚝 서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고구려 벽화(壁畵)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달님은 왼편 쪽문을 살며시 열고 은은한 목탁 소리가 울려 퍼지는 대웅전 법당(法堂)으로 들어갔다. 부처님 앞에서 모락 모락 타 오르는 향내가 온몸을 감싸았다.

"자비(慈悲)로우신 부처님!"

달님의 입에서는 '자비로로우신 부처님'이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눈시울이 뜨거워 지고 스르르 눈물이 흘렀다. 달님은 부처님은 위대해서 좋았고, 거기다가 '자비(慈悲)로우시다'는 말이 더욱 좋았다. 달님은 자비(慈悲)롭다는 말의 문자(文字) 풀이를 해 보았다. 자(慈)는 인자(仁慈)하다는 뜻이다. 비(悲) 자는 슬프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달님의 마음과 같을가. 이 세상에서 달님처럼 슬픈 사람이 어데 있단 말인가.


자비로우신 부처님

"슬픔을 너그럽게 안아 주시는 부처님이시어....."

달님은 마음 속으로 띬조렸다. 기독교에서는 성자 성신 성령의 삼위일체(三位一體)가 있다지만 달님은 그 때부터 부처님과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다면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남편과 자라나고 있는 세 아들, 그리고 슬픈 자신을 포함한 사위일체(四位一體)가 신앙으로 굳어진다. 달님에게는 부처님과 남편과 자식과 자신이 바로 신앙(信仰)이었고, 자신과 아들들과 남편과 부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 전에는 지킬 수 없었다.

대웅전에서 나와 정혜사 길로 올라섰다. 올라가는 길에 거대한 미륵불이 있고,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동그란 만공탑(滿空塔)이 있다. 만공탑은 탁객(濁客) 도승(道僧) 경허(鏡虛)의 제자로 항일(抗日) 불교(佛敎)의 거두(巨頭)이며, 수적사를 중창한 송만공의 기념비(記念碑)이다.

조금 올라가면 가파른 언덕에 높은 돌 축대를 쌓은 곳에 넓은 마당이 나온다. 마당 가의 축대 옆에는 백 년 노송이 허리가 굽은채 마당을 뒤엎고 있다. 바로 그곳에 정혜사가 있고, 그 때 정혜사에는 40도 되지 않은 예쁜 여승(女僧) 김일엽이 기거하고 있었다. 김일엽은 완고한 조선 시대의 잔유물인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풍미하고 있을 때에 자유(自由) 연애론(戀愛論)을 주창할만큼 신여성(新女性)의 대표 주자었고, 이름난 여성(女性) 신인(新人) 시인(詩人)이었다.


김일엽과 달님과 정혜사

그가 세상에서 출가(出家)하여 수덕사에 와 있었고, 그 사실이 너무나 유명하여 수덕사를 찾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김일엽을 찾으러 정혜사까지 올라왔다. 사람들은 김일엽이 자유연애론을 주장하며 사생아(私生兒)를 낳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여 부처님의 품에 들어 왔다는 말도 하고, 실제로 그가 열반(涅槃)한 다음에는 자기가 김일엽의 아들이라고 세상에 공개한 무명(無名) 화가(畵家)가 나타나기까지 하였지만, 그 사실을 누가 알 것인가. 출생은 어머니만의 비밀이다. 김일엽은 끝내 이에 대한 말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달님은 정혜사에 김일엽이 있기 때문에 올라간 것이 아니다. 사실 그 당시 달님이 김일엽 같은 신여성, 김일엽 같은 여승에 관심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달님은 이 절이 송만공 스님이 참선(參禪)과 함께 공부하신 곳이라 그 곳을 찾았다. 실제로 내가 어려서 어머님의 입에서 송만공 소리는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들었어도 김일엽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정혜사까지 올라와 부처님께 절을 하고 나니 해는 서산에 저물고 있었다. 달님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여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관자리 집에 왔다. 벌써 어둠이 깔린 가을 밤 초저녁이었다.
qqpp (2006-08-26 17:11:50)  
관(棺) 자리

막내 아들이 죽자 할아버지는 앞이 캄캄했다.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도 따가웠다. 더 이상 느티나무 마을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다. 동남향 양지 바른 마을인 느티나무 마을의 앞에 있는 들판과 내를 건너면 서북향 음지 마을인 관자리라는 마을이 있다. 관라지란 양편에 산이 활개처럼 늘저져 나오고 가운데가 오목 평평하여 꼭 관을 놓을 자리와 같이 생긴 마을이라 붙은 이름이고, 후에 관 자리라는 말이 흉하다 하여 관사리(觀寺里)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관사리란 멀리 수덕사(修德寺)가 보이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관사리에서 수덕사까지는 약 20리, 8킬로미터 되는 거리이다.

할아버지는 정든 땅을 떠나 솔가(率家)하여 관자리로 이사를 했다. 난리 후에 가족들이 모여 살던 때라 식구(食口)가 대단히 많았다. 송 참봉의 본가(本家) 기와집을 뜯어 홍성 읍내 마구셍이에 새 집을 짓고 분가하여 홍성중학교 학생들의 하숙집을 운영하던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 외아들이고 홍성농업중학교를 다니던 완근이 형님과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던 세원이 누나와 정원이 누나, 그리고 달님과 우리 3 형제가 관자리 집의 식구들이었다.

느티나무 마을에 살 때에도 난리와 흉년이 겹처 식량난으로 봄에 뒷산에 올라가 물 오른 솔 껍질을 벗겨다가 송진을 빨아 먹던 기억이 난다. 관자리 마을에 와서는 새봄에 논밭에 나가 냉이 달래 쑥을 뜯어, 많은 식구들이 멀어건 쑥죽을 먹던 일이며, 초여름이 되면 논에 파랗게 솟아난 자운영을 베어다가 자운영 나물을 해먹던 생각이며, 땔감이 모자라 동네 사람들이 줄을 지어 지게를 지고 삼준산으로 나무를 다니던 생각이 난다.
qqpp (2006-08-26 17:19:03)  
천년 고찰 수덕사의 고구려 담징 벽화

지금은 쌍천에서 수덕사까지 아스팔트가 깔린 길이 뻥! 뚫려 승용차들이 쾌속(快速) 질주(疾走)하지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질 때인 그 때는 사람은 살지 않고 토끼와 노루, 늑대와 여우, 곰과 호랑이들이 혼거(混居)하고 있는 원시(原始) 밀림(密林) 지대였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1940년대까지 노루와 여우와 늑대가 심심치 않게 나타났고, 1950년대 중반에 어떤 젊은이는 밤 중에 길을 걷다가 호랑이를 만나 놀라 입을 벌어진 후에 평생 동안 입이 벌어진 병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일도 있다. 철없는 아이들은 그 노인의 입을 보면 '호랑이 입'이며 도망을 첬다.

또 하루인가 이틀인가를 걸어 드디어 덕숭산 수덕사에 도착했다. 수덕사는 문자 그대로 '덕(德)을 닦는[修] 절'이었다. 대웅전(大雄殿)은 현존(現存)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木造) 건물이며, 이 건물의 아름드리 기둥과 대들보는 소나무가 아니라 칡나무라는 구전(口傳)이 있다. 백제 무왕이 중건(重建)하고, 고려 공민왕이 중수(重修)하였으며, 일제(日製) 시대에 한국 최고 해탈(解脫) 고승(高僧)으로 일컬어 지고 있는 경허(경(鏡)虛) 스님이 불력(佛力)을 발휘하여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그 뒤를 이어 만공(滿空) 스님에 의하여 오늘과 같은 대사찰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수덕의 품 안에서 삶의 평화를 찾은 여인으로는 춘원(春園) 이광수의 애인(愛人)으로 신여성(新女性) 운동을 벌이다가 실연(失戀) 끝에 불자(佛子)로 귀의(歸依)한 '청춘을 불사르고'의 김일엽 스님이 유명하다.

수덕사는 1930년대 보수(補修) 수리(修理) 중창(重創) 사업을 했다. 그 때에 명문(名文)으로 수덕사의 사찰(寺刹) 건립기(建立記)가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고찰 중에 흔치 않는 절이다. 거기다가 보수 공사 중에 다섯 점의 귀한 그림이 나왔다.

하나는 악기를 연주하며 식사를 하고 하늘로 날아가는 진악공양비천도(秦樂供量飛天圖)이고, 다른 하나는 수중(水中)에 피어 있는 꽃들을 그린 수화도(水花圖)였고, 또 하나는 들꽃들을 그려 놓은 야화도(野花圖)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용(龍) 중에서도 용으로 알려진 황금(黃金) 용을 그린 금룡도(金龍圖)였고, 마지막으로 발견된 고화(古畵)가 다섯 신선(神仙)을 그린 오선도(五仙圖)였다. 이 그림들은 고화 중에서도 보통 고화가 아니다. 한국 최고(最古)의 고화이며, 고구려 의 유명한 화가인 담징의 그림이라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그러나 허망하다. 능(陵)은 능으로 있을 때에 가치가 있고, 파헤치면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 모든 벽화(壁畵)들이 천년 고색(古色)을 순식간에 상실한다. 수덕사에서 발견된 고화(古畵)들도 그랬다. 숨겨진 벽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자마자 퇴색(退色)하였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 풍진(風塵) 세상의 풍화(風化)로 흔적 조차 없어졌다. 겨우 남은 것이 서까래에 희미한 잔상(殘像)과 잔영(殘影)으로 남은 그림 흔적 하나뿐이다. 이제 수덕사에 가면 수덕사를 창건한 사람도, 중건한 사람도, 중수한 사람도, 중창한 사람도, 대사찰로 만든 대승(대(大僧)의 모습도, 그림을 그린 담징의 작품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적막한 산사(山寺)의 은은히 울려 퍼지는 풍경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이 절에 남겨 놓은 깊은 숨결로 덕을 닦아야 한다.


600년 노거수가 된 느티나무 지팡이

고려의 길손은 수덕에서 마음을 닦고 덕을 쌓은 다음에 수덕사의 부처님과 헤어져 귀향(歸鄕) 길에 올랐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지금은 50 여 개의 관광 호텔과 여관이 울긋불긋 저마다 제 모습을 자랑하는 덕산온천 쪽은 초행(初行)이라 갈 염두(念頭)가 나지 않았다. 길손은 온 길로 되돌아 가기로 하고 느티나무 가지를 꺾어 만든 지팡이를 짚으며 오던 길을 재촉했다.

한굽이 한굽이 산을 넘고 들을 지나고 내를 건널 때마다 망한 고려가 그리웠다. 최영이 그리웠다. 정몽주가 그리웠다. 신흥 조선이 싫었다. 이성계가 실었다. 정도전이 싫었다. 더 가고 싶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고 땅을 보았다. 하늘을 보아도 어둡고 땅을 보아도 어두웠다. 앞을 보아도 깜깜했다.

"나는 갈 곳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라가 망한 판에 연명(延命)할 면목(面目)조차 없는 미물(微物)이다. 이 곳에 몸을 묻자."

그리고 나그네는 그 자리에 지팡이로 짚고 오던 느티나무를 심고, 생을 마감하였다. 천리(天理)는 오묘(奧妙)하다. 이 길을 걷던 고려의 길손은 갔으나 그가 짚었던 지팡이는 살았다. 정몽주가 피를 뿌리고 죽은 자리에 혈죽(血竹)이 솟아 났고, 이 이름 모를 고려의 길손이 몸을 묻은 자리에 지금은 600년 노거수(老巨樹)가 서 있다.

우리들은 한국 최고(最古) 최고(最高)의 노거수(老巨樹)로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에 서 있는 은행나무를 가르킨다. 신라의 마지막 세자(世子)로 신라가 망하자 마의(麻衣)를 걸치고 산천(山川)을 떠돌았다 하여 마의(麻衣) 태자(太子)라 부르는 세자가 짚고 왔던 은행나무 지팡이가 살아난 나무라 한다.

조선 세조는 이 은행나무에 당상관직 벼슬을 내리고, 신령(神靈)스러운 나무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수령(樹令)은 따져 보면 알 것이고, 높이는 61 미터에 둘레는 10 미터에 이른다. 수덕사 가는 길 옆에 서 있는 600년 노거수 느티나무는 높이는 용문사 은행나무 보다 낮으나, 둘레는 비슷하고, 가지기 품은 품 안은 용문사 은행나무의 몇 배가 된다.
qqpp (2006-08-27 09:08:22)  
풍수지리가(風水地理家)들이 가장 좋은 자리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고 있는 남연공의 묘소(墓所)가 있어 유명한 가야산(伽倻山)과 천년(千年) 고찰(古刹)로 경허(慶虛) 스님과 만공(滿空) 스님과 일엽(一葉) 스님을 배출하여 유명한 수덕사(修德寺)가 있는 덕숭산(德崇山)은 좌우에 날개를 달고 있다. 오른쪽 날개는 삼존산(三尊山)과 명덕산(明德山)이고, 왼쪽 날개는 용봉산(龍鳳山)과 백월산(白月山)이다.

그 양쪽 날개 사이에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마을들이 드문드문 산밑에 펼쳐져 인간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고, 그 마을들의 한 가운데로 맑고 푸르고 깨끗한 냇물이 흐른다. 이름하여 아름다울 가(嘉), 골 곡(谷), 내 천(川) 자(字)의 가곡천(嘉谷川)이다.

가곡천이 흐르는 명덕산 아래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지금도 서 있다. 어떤 사람은 수령(樹齡)이 600년이 되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이를 헤아릴 수 없어 천년(千年) 노거수(老巨樹)라 한다. 그 느티나무 마을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가곡천 일대는 물론이고 덕산(德山) 당진(唐津) 홍동(洪東) 청양(靑陽) 천북(淺北) 보령(保寧) 해미(海美) 서산(瑞山) 일대에 경작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
작은아버지 묘는 명덕산 동남 줄기 중턱 우리 산에 있었다. 그 먼 곳까지 마을 사람들이 상여(喪輿)를 메고 가서 모시던 기억이 선하다. 대단히 험한 산 깊은 골짜기의 양지 바른 곳이었고, 일본 놈들이 혈(血)을 끊어 놓은 대기티 아래였다. 후에 우리 집 종산(宗山)에 가족 묘지를 만들어 지금은 서부면 송천리에 이장(移葬)하여 모셨다.

어렸을 때에 좌근 이와 나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추석 전이면 매 해 대기티 아래에 있는 작은아버지 묘에 가서 참초(參草)를 했다. 고북에 사시던 양근 형은 대기티를 넘어와 우리와 함께 참초를 하고 가셨다. ///
성명 : 송우(宋祐) SONG Woo
사무실 : 서울 강남구 청담동
나이 : 1942년생
사무실 : 전화 544-3128, 6242-3128
인터넷 : http://www.chollian.net/~songwoo
충남 홍성 가곡국민학교 졸업
충남 홍성 갈산중학교 졸업
충남 홍성 홍성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제8대 국회 의원 비서관
제9,10대 국회 신상초 의원 비서관
제11대 국회 우병규 사무총장 비서관
사초출판사 대표/사초기획실 대표
인간극장-2001
qqpp (2006-08-27 09:17:11)  
휘영청 달이 밝은 밤이었다. 어머니는 밤 열 두 시를 기다려 샘에 나나 맑은 물을 떠오셨다. 깨끗하고 찬 물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신 후에 하아얀 사발에 한 가득 붓고 조심 조심 장광으로 가셨다. 장광이란 장독이 놓여 있는 곳이고, 대개는 부억을 통하여 집의 뒷켠에 있고, 남향 집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의 주택 문화로 보면 대개는 집의 북쪽에 있다.


칠성님께 빌고 빌어

우리 집 장광은 나무 울타리와 집의 사이에 있었다. 왼편에는 대나무가 우거져 있고, 뒤로는 싸리나무와 대나무가 뒤섞여 자라며, 오른 쪽으로는 시누대라는 아주 곱고 매끈하게 자라는 대나무 숲이 있었다. 일반 대나무는 집에 흙벽을 할 때에 주로 사용하고, 시누대는 당시 긴 담배대나 작은 생활 용품들을 만들 때에 주로 쓰던 재료이다.

장광은 땅을 마당처럼 편편하게 다진 다음에 비가 오면 배수가 잘 되도록 아래에 도랑을 파 놓은 곳에 있었다. 된장 고추장 간장 독이 나란히 정리되어 있고, 낯에는 햇볕을 보도록 뚜껑을 열어 놓고, 밤이 되면 이슬을 맞을 세라 뚜껑을 닫는다. 여름철 같은 경우에는 비가 오면 일을 하다가도 장독 걱정에 뜀박질을 하는 아낙네가 많았다.

어머니는 정한수(淨寒水) 한 사발을 장광 위에 놓고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고 나서는 그 정한수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쳐들고 북두칠성을 향하여 정성으로 빈 다음에 다시 장광 위에 올려 놓는다. 그리고 무슨 주문(呪文)같은 소원을 빌고 빌며 한 없이 빈 다음에 방으로 들어오셨다. 아마도 자신의 소원을 그렇게라도 빌어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동서남북 액막이

한 번은 나에게 복숭아 나무 가지 중에 가늘고 길고 단단한 놈을 두 개 잘라오라 하셨다. 지금은 농촌에 가도 과일 나무가 그리 많지 않지만 그 때는 집집 마다 북숭아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호도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등을 집 주위에 심고 있었다.

내가 꺾어가지고 간 복숭아 나무 가지의 하나에 어머니는 왼켠으로 가늘게 꼰 새끼줄로 활을 만들었다. 나머지 하나는 화살용이다. 언제 마련하셨는지 어머니는 수수팥단지를 내놓으셨다. 수수팥단지란 수수와 팥을 새알 크기로 만든 떡이었다. 아직 따끈따끈한 기운이 손에 닿았다.

"이걸 가지고 밖에 나가 동서 남북으로 각각 세 개씩 화살에 꽂아 쏘아라."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으나 나는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밖에 나가 화살을 쏘았다. 지금 생각하면 동서남북의 액(厄) 막이 의식(儀式)이었던 것 같다.

그런 신령님과의 대화는 요즘 사람들은 대개 종교 의식으로 푼다. 그러나 그 당시는 교회는 없고, 절은 있으나 너무 멀어, 대개는 당나무가 있는 당에 성황당(城隍堂)에 가서 제사를 오리거나 산꼭대기 또는 잘 생긴 바위돌 앞에 가서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나로서는 몹시 못마땅한 일이기도 했다. 내 생각에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것은 그래도 무슨 기원(祈願) 같은 성스런 모습이 보여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으나, 수수팥단지를 만들어 동서남북에 쏜다고 해서 우리 집으로 오던 액운(厄運)이 도망칠 리가 없다는 생각에 어머니가 황당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덕사를 가는 것도 그랬다. 내가 생각한 수덕사는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수덕사가 아니라 경치 좋은 명산대찰(名山大刹)이라 놀고 구경하는 대상으로서의 수덕사였다. 어머니는 그렇지 않으셨다. 없는 살림에 공양미(供養米)을 이고 관자리 마을을 떠나 그 먼 수덕사까지 가셔서 부처님 앞에 빌고 또 비는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푸념과 신앙

때로는 무엇하러 이 바쁜 세상에 그 먼 절까지 가서 고생을 하고 오시느냐고 푸념도 했지만, 그건 내가 불자로서의 어머님의 신앙의 깊이를 몰랐기 때문에 했던 푸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도 어머님은 참으로 열심히 절에 다니셨고, 절에 갔다 오시면 마음의 편안을 얻으셨던 모양이다.
(2006-09-17 22:45:42)
남산에서 올린 봉화 중에 관악산 봉화대에서 받은 봉화는 남(南)으로, 서(西)로 줄달음쳐 서해안(西海岸) 홍주목에 있는 백월산(白月山)에서 받아 명덕산(明德山) 서쪽 기슭 끝에 있는 봉화대에서 받아 밝혔다.


명덕산의 정기(精氣)

명덕산은 이름 그대로 '덕(德)이 밝을[明] 산(山)'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산이다. 고려 길손이 지나던 쌍천에서 수덕사 쪽으로 진입하면 바로 왼쪽에 나타나는 산이다. 풍수지리(風水地理)로 볼 때에 이 산 아래에서는 큰 인물이 난다고 한다. 그 속설(俗說)이 맞았는지는 모르나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이 이 산의 서쪽 맨 끝 아래 마을에서 태어났고, 명덕산 서쪽 끝 마루에 있는 대기티라는 고개는 일본제국주의 풍수(風水) 대가(大家)가 조선총독부에 고자질하여, 맥(脈)을 끊고 철퇴(鐵槌)를 박아놓는 만행(蠻行)을 저질로 놓은 곳이다.

대기티를 끊을 때에 산 속에서 칠흙 피와 같은 짙은 황토 물 수맥에서 한없이 많은 황토물이 나왔다고 구전(口傳)되고 있다. 이를 본 일본 풍수 대가는 쾌재(快哉)를 불렀겠지만 백의(白衣)를 입었던 한민족 그 고장 사람들은 큰 인물이 나올 산맥(山脈)을 끊었다고 일본을 원망하며 통곡(痛哭)을 했다.

명덕산 동남 쪽 두 번째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 행정 명칭으로 홍성군 갈산면 신안리(新安里)이고, 신안리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첫 번째 동네인 신촌(新村)과 전에는 안악골이라 부르던 두 번째 마을인 안악(安岳)으로 구성되어 있고, 세 번째 부락이 가곡초등학교가 있는 가곡리(嘉谷里)이고, 가곡리는 가곡과 동막골, 그리고 삼준골이라는 세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존사와 어라사와 천진암

명덕산은 가곡리 삼준골에 있는 삼준산으로 북행(北行)으로 이어진다. 삼준산이란 모습이 준수(俊秀)한 세 봉우리의 산으로 이루어 져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고,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삼존불(三尊佛)을 모셨던 삼존사(三尊寺)가 있었다 하여 삼존산이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1950년대까지 삼준산에는 실제로 삼존사라는 아주 작은 암자(庵子)가 산 꼭대기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천년 고찰(古刹)이 많은 우리나라이지만, 절은 대대로 중을 잘 만나야 번창한다. 경주 토함산의 불국사가 그렇고, 전라도 지리산의 쌍계사와 화엄사가 그러며,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가 그렇다. 송광사의 조계사가 그렇고 덕숭산의 수덕사가 그렇다. 그래서 남들은 명산(名山) 대찰(大刹)이라는 말을 잘 쓰지만 나는 명승(名僧) 대찰(大刹)이라는 말을 잘 쓴다.

중을 잘못 만나 폐허가 된 절은 너무나 많다. 중이 게집질을 하여 불타 없어졌다는 절도 심심치 않게 거론된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두 절이 있다. 하나는 강원도 정선과 영월 사이를 흐르는 동강(東江)의 유서(遺緖) 깊은 어라연(魚羅淵)을 굽어 내려 보고 있던 어라사(魚羅寺)의 폐허(廢墟)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도 광주 땅에 있던 천진암(天眞庵)의 폐허이다.

어라사는 너무나 아름다운 깊은 산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천진암은 이 땅에 천주교를 전파하게 해준 '천주교의 모태(母胎)'와 같은 절이다. 어라사의 역사는 거론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천진암의 역사만은 기록에 남겨야 한다. 한양 땅에서는 천주교 신자라면 모조리 목을 잘라 순교(殉敎)의 길을 택하기 전에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이 난리 북새 통에 한국 천주교에서 성자(聖者)로 모시고 있는 이벽이라는 서양(西洋) 천주(天主) 종교(宗敎) 신봉자(信奉者)가 한양에서 천진암으로 피신(避身)해왔다.

기독교는 공생(共生) 종교가 아니라 배타(排他)의 종교이다.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근간(根幹)으로 삼는 예수 천주 기독교는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예수 이외에는 불교(佛敎)도, 회교(回敎)도, 유교(儒敎)도 인정하지 않고, 모조리 사탄 사교(邪敎)로 모는 종교이다. 이 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천진암의 어진 스님들이 쫓겨온 서교(西敎) 신자(信者) 이벽을을 절 안에 숨겨 주고, 비밀(秘密) 천주(天主) 강독(講讀)까지 열게 했다.

조정(朝廷)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서교 잔당(殘黨)의 일부를 숨겨준 천진암을 박살(撲殺) 내라는 맹호령(孟虎令)이 떨어졌다. 천진암은 곧 쑥밭이 되었고, 그 때의 쑥밭은 몇 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 절터에 중은 다시 오지 않고 한국 천주교 순교사에 관심을 가진 신부(神父) 한 사람이 왔다. 그리고 거기 그 절터에 한국 천주교 발상지(發祥地)라는 성지(聖地)를 만들고, 전국 천주교 신자들이 순례(巡禮)하도록 대대적인 성역화(聖域化) 작업을 하고 있다.


노거수의 자리

나는 그 땅을 가 보고, 한국 천주교는 그 땅을 천주교이 발상지로 성역화하기 이전에 자기들이 신세를 진 천진암의 복원(復原)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천진암이 없었으면 김대건 이후에 한국 천주교 문화의 찬란한 꽃을 피우게 한 이벽이 숨어 안거(安居)할 곳이 어디었을가. 삼준산에 있었던 삼존사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었던 절인지는 잘 모르자, 나는 사라진 삼존사와 어라사를 기억을 떠올리며, 아스라히 천주교 성지로 변한 절없는 천진암 옛터를 생각한다.

삼준산과 명덕산은 충남 홍성군과 서산군의 군계(郡界)를 이루는 산이다. 서북쪽은 서산군이며, 동남쪽을 홍성군이다. 1950년대까지 홍성 신촌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 서산 고북으로 갈 때에는 풍수지리의 한(恨)이 맺힌 대기티를 넘어갔고, 대기티에서 봉화대 쪽으로는 아직 모습을 들어내지 않은 석굴(石窟)이 뚫려 있어, 옛날 사람들은 한 쪽 굴에서 불을 놓으면 반대편 굴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더욱 신령스러운 산으로 생각했었다. 600년 노거수는 명덕산이 남쪽으로 뻗어 나온 평퍼짐한 산자락의 맨 마지막 끝, 그러니까 신촌 마을에서 앞을 내다 보면 왼쪽 언덕 끝의 오똑한 명당(明堂)에 자리하고 있다.
(2006-09-17 22:48:48)
높 이 연암산 440.8m, 삼준산 489.9m


연암산은 서산군고북면과 해미면 경계에 있고 삼준산은 서산군 고북면과 홍성군 갈산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건너편의 같은 산줄기 속에 있는 유명한 사찰인 수덕사와 덕숭산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산을 많이 찾는 사람들에게도 아직 생소한 산이다.강원도 주변에 있는 산처럼 첩첩이 산이 펼쳐지는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확트인 바다와 평야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높은 산위에 올라선 기분이며 특히 봄철 산행시에는 온산에 진달래와 기암괴석 사이사이에 이름모를 꽃들로 치장되어 마치 꽃동산을 오르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정상은 서해안고속도로가 보이고, 가야산, 수덕산, 용봉산, 일락산, 오서산등과 함께 간월호가, 예산 시내등 조망이 일품이다.




연암산은 간월호와 서해안고속도로 고북의 평야지대가 보이고 삼준산쪽을 바라보는 조망이 좋다.정상보다 능선을 따라 50m쯤 더가면 소나무와 함께 전망바위에서 보는것이 더욱 좋고 어느때 쌓은지는 모르지만 성터 일부가 남아있다.다만 천장사 부근이 산불이나 보기가 조금 흉하고 등산로가 쓰러진 나무로 인하여 조금 희미하다.두개의 산을 연계산행하려면 장요리 마을을 기점으로하면 원점회귀 산행을 할수가 있고
해미고개에서 시작을 한다면 405봉에서 삼준산과 연암산을 왕복하여야 하는 단점이 있다.연암산 밑에 있는 천장사는 신라때 창건한 절로 조선말 고승 경허선사와 근세의 고승 송만공(1871-1946) 대사가 이곳에서 불법을 계승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인근에 해미읍성, 수덕사, 덕산온천등이 있어 산행과 여행을 동시에 할수 있는 가족산행지로 적격이다.




산행기점 찾기




해미고개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에서 덕산온천방향으로 가다로 서산군 해미면과 예산군 덕산면의 경계에 있는 해미고개에서 우측으로 묘있는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장요리

서해안고속도로 해매 IC에서 나와 홍성방향으로 가다 고북면사무소 앞에서 800m 간후 천장사입구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등산코스

장요리 - 천장사- 연암산 - 연장이고개 - 무너미고개 - 벽장바위 - 405봉 - 삼준산 - 갯골재 - 장요리(4시간)

해미고개 - 405봉(30분)

405봉 - 연암산 (60분)

405봉 - 삼준산(30분)
(2006-09-17 22:50:22)
http://blog.naver.com/piero6437?Redirect=Log&logNo=28346748
(2006-09-17 22:53:31)
http://blog.naver.com/alpsok?Redirect=Log&logNo=40020379702
(2006-09-17 23:50:35)
삼준산(三峻山 = 三尊山 )

홍동산에서 연결된 덕숭산에서 일 지맥은 가야산이 되고 여기에서 뻗은 일 지맥이 서산군 고북면을 지나 갈산면 가곡리에 와서 흘립한 것이 삼준산이다. 일명 삼존산의 압휘봉은 두 갈래로 나뉘어 가곡리에 뒷산이 되었는데 북에서 남으로 향하여 가곡과 운곡사이에 양봉이 돌기하 였는데 양봉의 거리는 60척이다. 이 사이에 돌다리가 놓 여 있는데 이것을 운교라고 하며 보는 사람은 누구나 조 화옹의 신비를 경탄케 한다.

삼준산은 충남 홍성군과 예산군의 접경지를 이루고 있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넓은 평원위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 봉우리가 제법 웅장하다. 삼준산은 홍성에서 약1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너편의 같은 산줄기 속에 있는 유명한 사찰인 수덕사와 덕숭산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산을 많이 찾는 사람들에게도 아직 생소한 산이다.

강원도 주변에 있는 산처럼 첩첩이 산이 펼쳐지는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확트인 바다와 평야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높은 산위에 올라선 기분이며 특히 봄철 산행시에는 온산에 진달래와 기암괴석 사이사이에 이름모를 꽃들로 치장되어 마치 꽃동산을 오르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등산코스
1.식당-수양전-외딴집-암자-정상-암자-우측계곡-삼거리

2.군계고개-연장이고개-삼신사터-정상-삼주골-운교봉-평리상회(2:30)
(2006-09-17 23:59:25)
http://www.moamt.co.kr/hugi/gumbook05.htm
qqpp (2006-11-01 17:23:14)  
##### ☞ 16. 갈산 지맥 ☜ ######
예산덕산의 고려부페(금북정맥)에서 홍성갈산면 소재지구간(서산예산홍성의시군계)



★★★ 산행일시 2005.5.15일 산행소요시간 7시간20분 ★★★
덕산고려부페===30분===금북정맥갈산지맥분기점(뒷산449.1m)===40분
===45번국도(덕산고개)===15분===연장이고개===50분===삼준산(489.9m)
===20분===통신탑분기점===5분===폐쇠된통신탑(지맥확인상필요)===5분
===통신탑분기점===10분===368m===30분===224m봉===20분
===124m봉===10분===서해안고속도===10분===세면포장도로===35분 .....명덕산?....대기티...
===성터흔적===5분===봉화산(228m)===10분===내존사===10분
===세면포장고개===10분===29번국도===35분===조경농장(돌탑)
===5분===포장도로===10분===폐이동통신탑===15분===한국통신통신탑
===35분===삼불산(깨어진삼각점:164m)===25분===갈산면소재지
qqpp (2007-12-14 23:29:03)  
서산 태안 에는
백두대간(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지맥이며
서산 태안의 허리에 해당하는 금북정맥이 자리하고 있는데 錦北正脈이란
한남금북정맥의 끝인 칠장산(492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경기도 안성의 칠현산(516m) 천안의 성거산(579m) 공주 차령고개 차동고개
청양의 백월산(395m)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서북으로 뻗어 오서산(790m)
월산(395m) 덕숭산(495m) 가야산(678m)에 이르러 다시 서쪽으로
백화산(284m) 지령산(218m) 안흥진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1대간 13정맥의
하나로서(길이 약 240km)
qqpp (2017-12-06 13:36:16)  
운정+봉곡 운곡리 대기티넘어
운곧의 굴다리 굴-운교....운교봉...명덕봉 뒷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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