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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qpp(2008-04-28 16:21:02, Hit : 5156, Vote : 502
 [탐방기행] 덕숭낭자와 버선꽃 전설 (펌)


관음의 화신 덕숭낭자 버선꽃 - 덕숭산 수덕사


덕숭산 밑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수덕사는 한국 선종을 중흥시킨 경허 만공스님이 크게 
일으킨 도량으로, 산 내에는 10개의 대소사찰이 자리하여 소금강이라고 일컬을 만큼
주위 경관이 빼어나다. 덕숭산의 아담한 기슭에 자리한 천년 고찰 수덕사는 백제 법왕원년(599) 지명법사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청도의 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비구니의 도량이다. 조선 후기에는 경허스님이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 경허의 제자로 만해 한용운과 쌍벽을 이룬 만공스님이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했다. 수덕사의 자랑거리는 대웅전, 1308년 건축되어 700여년의 세월을 버티고 있는 이 아름다운 건물은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현존하는 건물중 3번째로 오래된 건물로, 고려시대 말엽에 유행했던 주심포 양식을 대표하고 있다. 수덕사는 고려 충렬왕 34년(1308) 건립된 국보 49호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3층석탑, 범종각, 청련당 등의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수덕사에서 1천20개의 돌층계 또는 산길을 오르면 정혜사가 있다.
▲ 수덕사는 비구니절이 아니며 2천 수백여 조계종 사찰 중 다섯 총림 중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2004 임윤수

오래 전 송춘희라는 가수가 불렀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때문인지 수덕사를 비구니(여승) 절로 생각하는 사람이 꽤나 많은 듯하다. 그러나 수덕사에는 국내 최초의 비구니 선방인 견성암과 환희대가 산내 암자로 있을 뿐 비구니(여승) 절은 아니다.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계셨던 법장 스님도 스승이신 원담스님도 2008년초 모두 입적하셨다.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5대 총림(叢林) 중 한 곳이다. 총림이란 범어 'vindhyavana(빈타파나)'의 번역으로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현재 우리 나라 2천 수백여 조계종 사찰 중 총림으로 지정된 곳은 수덕사의 덕숭총림, 해인사 가야총림, 통도사 영축총림, 송광사 조계총림, 백양사 고불총림 5곳뿐이다.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과 경전 교육 기관인 강원, 그리고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 및 염불 교육 기관인 염불원을 갖추어야 하며 총림의 어른이신 방장 스님이 계셔야 한다.
▲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은 3번째 고건축물인 대웅전은 건물 자체가 국보다.
오래 담아온 세월만큼이나 대웅전은 묵직해 보인다. ⓒ2004 임윤수


수덕사를 찾아가는 길은 그렇게 험한 산을 넘지도 않고 커다란 강을 건너지도 않는다. 온천으로 유명한 온양과 덕산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가로지르는 지방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그 곳에 덕숭산이 있고 덕숭산 품안에 수덕사가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행지 기분을 물씬 나게 하는 상가 골목을 지나 15분쯤 들어가면 일주문에 도달하게 된다. 일주문 옆에는 초가로 된 수덕여관이 있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이 살았던 곳이다. 여관 앞에는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다. 화백은 이 바위에서 구상을 잡고 캔버스를 펼쳐 그림을 그렸을 듯 하다.




수덕여관

수난의 세월 살며
추억뭉치 착착 쟁여 놓은 초가 객관
평생 내 생각만 그리다 간다
나혜석, 이응로 그 이름은 잊어다오
너희 스스로 알아서 사랑하며 살겠지만
내가 가졌던 거 다 필요 없다
조강지처가 뭐며 자식에 낭군도 놓았니라
머물렀던 추억은 암각하지 말 것
내 생각만 흔적으로 남아 있으라


(글. 강희창...수덕사 가을메모 중에서)


이응로 화백이 새긴 암각화



▲ 대웅전 앞에는 마당이 계단 형태로 되어 있다. 위쪽 마당 가운데는 3층석탑이 있고 아래 마당 가운데는 코끼리 석등 있다. 코끼리 석등 동쪽에는 법고각, 서쪽에는 범종각이 있으며 마당 어디서고 탁 트인 전망이 마음을 후련하게 해준다. ⓒ2004 임윤수



일주문을 들어서 이런 저런 문들과 전각을 지나게 되면 대웅전 마당에 서게 된다. 수덕사 대웅전은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이은 세번째 최고령 고건축물로 건물 자체가 국보 49호다.

오래 담아온 세월만큼이나 대웅전은 묵직해 보인다. 국보라는 감투의 무게를 빼더라도 세월이 느껴지는 기둥의 터진 자국에 저절로 손을 모으게 하는 그런 묵직함이 묻어나는 맞배지붕 주심포계 고건축물이다.

교구 본사의 커다란 사찰들 대부분이 그렇듯 수덕사도 몇몇의 산내 암자가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 바로 왼쪽으로 비구니승 도량인 환희대가 있고 원통보전이 있다. 경내를 지나 팻말을 따르면 견성암을 비롯한 암자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덕숭산 정상 쪽으로 산길을 오르면 정혜사가 있다. 정혜사는 평소 일반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국내 몇몇 선원 중의 한 곳이다.

대개의 고찰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전설이나 설화 하나쯤 가지고 있듯 수덕사에도 가슴을 여리게 만드는 설화가 있다. 절뿐만 아니라 절이 들어선 덕숭산이 연인으로 등장하는 애틋한 설화다. 설화의 귀착점이 되는 곳은 대웅전 서측 백련당 뒤쪽에 있는 관음바위다.
▲ 대웅전 서측 백련당 뒤쪽에는 관음상이 모셔져 있고
관음상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설화에 나오는 관음바위다. ⓒ2004 임윤수


전설


마늘 각시 덕숭낭자
수탉 벼슬 수덕도령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은
하얀 버선꽃으로 피어 성심을 말하거늘
싸울아비들아 그 신성한 정토에
어찌하여 창칼을 들며
어찌하여 오욕을 놓느냐

나라만 위한다면 모두 선이더냐
나무 삭정이 꺽듯 목을 베고 버였지
경허, 만공스님이 그 업을 대신했구나

( 강희창 글중 일부)

수덕사에 얽힌 전설


옛날 이곳엔 수덕이라는 도령이 살고 있었으며 사냥을 즐겨했다고 한다. 비록 늙었지만 몰이를 잘하는 할아범과 몇몇 머슴들을 데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도령은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시중 들던 할아범이 노루를 발견하곤 도령에게 활시위를 당기라고 채근하니 귀를 쫑긋 세운 노루 한마리가 숲 저쪽에서 다가왔다. 도령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고 화살을 막 쏘려다 엷은 눈웃음을 흘리더니 말없이 활을 거두었다.

몰이를 하느라 진땀을 뺀 하인들은 활을 당기기만 하면 노루를 잡을 판이기에 못내 섭섭해 하기도 했지만 도련님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어찌된 일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도령이 노루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너희들 눈에는 노루만 보이느냐? 그 옆에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고 반문을 했다. 그때서야 노루 옆에 서있는 처녀를 보게 된 하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루 옆에는 정말 아름다운 처자가 서있었다.

하인들 중 한명이 "도련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노루 대신 여인이라도… "하며 말끝을 흐렸다. 도령은 "에끼 이 녀석, 무슨 말버릇이 그리 방자하냐. 자 어서들 돌아가자"하고 야단을 치며 양반의 체통을 지키려 걸음을 재촉했지만 뛰는 가슴을 어쩔 수는 없었다.

노루 사냥이 절정에 달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여인! 어쩜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수덕 도령의 가슴은 더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도령의 마음엔 온통 아가씨의 환상뿐이다.

눈길에서 멀어져 가는 여인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들떠 있는 수덕의 가슴은 진정되지 안았다. 책을 펼쳐도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눈에 어리는 것은 여인의 아리따운 모습뿐이었다. 여인 대한 그리움은 열병처럼 도령을 엄습해 버렸다. 그러기를 며칠, 하는 수 없이 수덕 도령은 할아범을 시켜 그 여인의 행방을 알아오도록 했다.


할아범이 알아 온 바에 의하면 그녀는 바로 건넛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 낭자였다. 아름답고 덕스러울 뿐 아니라 예의범절과 문장이 출중하여 마을 젊은이들이 줄지어 혼담을 건네고 있으나 어인 일인지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덕의 가슴엔 불이 붙었다. 자연 글 읽기에 소홀하게 된 수덕은 훈장의 눈을 피해 매일 낭자의 집 주위를 서성댔다. 그러나 먼 빛으로 스치는 모습만을 바라볼 뿐 낭자를 만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열병 같은 짝사랑에 가슴을 태우던 수덕 도령은 용기를 내어 낭자의 집을 찾았다.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며 도령은 덕숭 낭자에게 진지하게 청혼을 했다. 만약 청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음으로라도 그 뜻을 풀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지만 낭자는 아직 혼인할 나이도 아닐 뿐더러 고아와 같은 미천한 처지라며 완강하게 청혼을 거절했다.

수덕 도령의 마음은 점점 더 낭자에게 빠져들었고 조급해졌다. 앉으나 서나 온통 낭자의 환상에 잡히게 되어 정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되어 몰골이 된 모습으로 다시 낭자를 찾아 혼인해 줄 것을 애절하게 간청했다.


▲ 설화에 나오는 관음바위에 피어난 꽃이다. 이 꽃이 정확하게 버선꽃인지는 모르지만 순백의 꽃잎에서 낭자의 아리따움을 연상하게 된다(2003. 6. 12) ⓒ2004 임윤수

* 버선꽃은 골담초라는 설...수덕사 홈피


수덕의 간청을 듣고 있던 낭자는 두 볼을 붉히며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낭자가 가지고 있는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면 청혼을 받아 주겠다는 말이었다. 낭자의 소망은 다름 아닌, 일찍이 비명에 돌아 가신 어버이의 고혼(孤魂)을 위로하도록 집 근처에 큰 절을 하나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도령은 낭자의 부탁을 쾌히 들어주겠다 약속하고 곧바로 불사에 착수한다. 마음이 바쁜 수덕 도령은 부모님의 반대와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상관치 않고 오직 불사에만 전념했다. 터를 가다듬고 기둥을 세웠다. 서까래를 올리고 벽을 쌓으며 기와를 구웠다. 불철주야로 불사에 혼신을 다하니 이윽고 한달만에 절이 완성됐다.

불사를 끝낸 수덕 도령은 한걸음에 낭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들뜬 마음에 낭자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막 단청이 끝낸 절을 구경하러 가자고 하니 낭자는 구경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고 한다. 한번도 절 짓는 곳을 다녀간 적이 없는 낭자가 불사된 절을 본 듯 말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할아범이 헐레벌떡 뛰어와 혼신을 다해 세운 절이 불길에 휩싸여 폭삭 주저앉았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동안의 공덕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절망감과 하루라도 빨리 낭자를 품에 안고 싶은 열망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순간이기에 수덕 도령은 좌절하며 부처님을 원망했다.


▲ 덕숭산 정상으로 오르다 보면 '소림초당'이란 편액이 붙어있는 초가가 나온다. 산길을 오르다 커다란 바위에 틀어 앉은 초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업이 한 꺼풀은 벗겨진다.
ⓒ2004 임윤수



그러자 옆에 있던 낭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이듯, "한 여인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일념으로 부처님을 염하면서 절을 다시 지으면 된다"고 위로했다. 수덕 도령은 결심을 새롭게 하고 다시 불사를 시작했다. 매일 저녁 목욕재계하면서 기도를 했으나 이따금씩 덕숭 낭자의 얼굴이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마다 일손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어 수행하듯 절을 완성할 무렵 또다시 불이 나고 말았다. 수덕 도령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낭자에 대한 도령의 사랑과 애틋함은 불사의 손길을 멈추지 않게 하였다.

또 다시 한달의 시간이 지나 드디어 신비롭기 그지없는 웅장한 대웅전이 완성되었다. 그 동안의 우여곡절이 주마등처럼 기억에 지나가니 도령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관세음보살"을 연송했다.

수덕은 흡족한 마음으로 뛰다시피 덕숭 낭자를 찾아 절이 완공되었음을 알린다. 이번에도 낭자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듯 도령을 반갑게 맞이하며, 소녀의 소원을 풀어주셔서 그 은혜 백골난망이며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 약속을 했다.

며칠이 지나 마침내 신방이 꾸며졌다. 오직 하나, 덕숭 낭자를 맞아들이기 위해 주위의 비난과 조롱쯤 아랑곳하지 않고 오랫동안 일념의 시간을 보내 온 도령에게 있어 신방은 꿈이었으며 뜨거운 피를 식힐 수 있는 유일한 도원이었다.



▲ 소림초당을 지나 더 올라가면 만공탑이 나온다. 둥그런 지구의 형태인 탑에서 뭔가를 느껴질 듯하다. ⓒ2004 임윤수

들뜸과 설렘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둘 만이 남게되었을 때 촛불 은은한 가운데 낭자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문을 열었다. "부부간이지만 잠자리만은 따로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말인가. 부부의 연을 맺었으면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도령의 뜨거움을 식힐 수 있는 길인데 잠자리를 따로 하자니….

도령의 가슴은 너무도 뜨거웠고 그 뜨거움을 주체할 수 없었기에 낭자의 애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수덕은 낭자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런 순간 뇌성벽력과 함께 돌풍이 일며 낭자의 모습은 섬광처럼 문밖으로 사라졌고 수덕 도령의 두 손엔 버선 한짝만이 남겨져 있었다.

은밀하게 차려졌던 신방도, 연지곤지를 찍고 아름답기만 했던 덕숭 낭자도 순식간에 세속의 탐욕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정신을 차린 도령이 손에 든 버선을 들여다보는 순간 신방에 있던 큼직한 바위와 그 바위 틈새에서 낭자가 신었던 버선과 흡사한 하얀 꽃이 피어 있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때서야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가 관음의 화신임을 알게되었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은 도령은 낭자와의 애틋한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수덕사'라 부르고 수덕사가 자리잡고 있는 산을 덕숭산이라 했다고 한다.

자신은 비록 덕숭 낭자의 품에 안기지 못했으나 자신이 불심으로 일군 절이라도 덕숭 낭자의 품에 안기고 싶어 절을 품고 있을 산의 이름을 덕숭산이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정혜사 경내에 있는 석탑이다. 선원에서 갇힌 듯 수행 생활을 하는 많은 선승들에 깨우침을 향한 염원과 기도의 애환이 깃들여 있을 듯 하다. ⓒ2004 임윤수



지금도 수덕사 인근 바위틈에서는 해마다 '버선꽃'이 피며 이 꽃은 관음의 버선이라 전해 오고 있다하니 기회 되면 관음이 화신한 덕숭 낭자를 닮았다는 버선꽃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흔들리는 마음과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절을 찾았건만 설화 속 덕숭 낭자와 수덕 도령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 다시 마음을 흔들어 댄다. 역시 40대 나이는 어느 것에도 흔들리는, 미혹되지 않을 게 없는 부불혹(否不惑)의 나약하고 위험한 나이인가 보다. 이제야 알겠다. 세월의 관성만큼 분명한 관성은 그 어디에도 없음을.. @ 글; 강화도령 ⓒ 2006 OhmyNews
하산길에..


벌써 찬바람 속 나무들 월동준비하느라 분주한데
덕숭산 그늘에 지펴온 목숨
널어 놓은 더덕처럼 쭈그렁 노파보살이
좌대 대신 좌판에 앉아 관세음보살을 외친다
돈부 한 뎃박, 산나물 여남은 묶음, 도토리 말 가웃......
어금니처럼 자란 분신들이야 어디서들 잘 살겠지
내가 짐이 될 수는 없음이라
남들은 급작스레 가기도 잘 가드만
마른 고사리 같은 이 질긴 목숨이랴
모두 버리고 훌쩍 갈 것이니라
나그네여 인연 한푼 주시고
여기 인연 한 보따리 가져 가슈
그 보살 떠나고 나면 무덤에 하얀 버선꽃 피려나.

( 강희창 글중 일부)


수덕사의 여승 / 송춘희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온 님 잊을길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적에
아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길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적에
아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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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스님, 나혜석, 이응로 이야기 <수덕여관>

수덕사 견성암은 "청춘을 불 사르고"의 저자 김일엽의 흔적이 남아 있는곳이고 수덕사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 자리잡은 수덕여관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고 하는
<실제로 한국최초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혜석의 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세간에서는 사람들이 암암리에 "술독사"라고 부르기도 함. 그 곳에 기반을 두고 있던 
경허선사가 술과 고기를 꺼리낌 없이 시식을 해서 그런지 그런 말이 세간에 은연중에 
돌고 있는것으로 추정이 된다. 

내가 수덕사에 처음 여행을 왔을때가 중학교 수학여행 시절이였었으니, 그때는 전혀 생각치 
못 했었지만 그 때 기준으로 따지자면 불과 4~5년전 까지는 일엽스님이 그 곳에 머물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1986년 평남 용강에서 태어난 김일엽은 이화여전에서 공부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신 
여성이었고,  자유분방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1928년 33세<어떤 자료는 38세>에 
불가에 들었다. 여승이 된 친구를 찾아 수덕사로 온 또 한 명의 신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일본 유학후 부유한 집안의 남편과 세계 여행을 떠났다가 파리에 머물며 그림을 공부하던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파경을 맞았다 한다. 이 후 수도승이 되려고 
수덕사를 찾았으나 만공선사로부터  중이 될 재목이 되지 못한다 하여 허락을 얻지 못하고 
일주문옆 수덕여관에 수년간 머물며 떠돌아 다니다 결국 무연고자 병동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곳도 수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사진 한방 찍어 놓은것이 없어 수덕사 싸이트에서 잠시 빌려왔다. 
요즈음은 수덕여관이 재건축을 한다 하는데 앞으로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 당시 청년화가 고암 이응노 화백은 선배 화가를 만나기 위해 수덕여관을 드나 들면서 
나혜석과도 우정을 쌓았다 한다.  하지만 청년 화백이었던 이응노는 본 부인 박귀희를 두고 
젊은 후배 화가와 파리로 유학을 떠난뒤 1960년대 후반쯤 동백림 사건에 휘말려 2년동안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하던중 본 부인 박귀희가 
감옥에서 고생하는 남편의 모든 뒷 바라지를 해 주었다 한다.  하지만 이응노화백은 또 다시 
파리로 떠났는데 그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하고 아내인 박귀희는 이제나 저제나 남편 
오기를 학수고대하다 그만 세상을 떠났다 한다. 
   
지금은 그 곳을 재건축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래 ! 까짓것 할려면 확실하게 허물어 
버려라 !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다 지쳐 저 세상으로 간 한 여인의 고달픈 한이 서려 
있는 곳인데 옛모습 남겨 두어서 무엇하리 ! 하지만 세속의 사람들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곳이 재건축 되는것을 허전한 마음으로 바라 보고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말이 잠시 
삼천포로 빠져 드는것 같아 좀 전에 하다 말은 
"청춘을 불 사르고의 저자" 김일엽 스님의 내력부터 마져 이야기 하려 한다.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 제1권 예산 " 내포땅의 사랑과 미움" 이란 제목의 글에 보면 
일엽스님은 1971년 세수 76세 법랍 38년으로 장수 하였다고 한다. <1993년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 초판발행본>
 
그러니까 1933년에 출가하여 세속에서 38년, 출가 수도승으로서 38년을 살아 왔다는 이야기다.  
지금 38세라고 하면 새색시 시집가서 새로운 출발을 해도 될 나이겠지만 그 때 당시 38세라고 
하면 한 물간 퇴물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 때 당시의 38세라면 손자, 손녀를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란 이야기다.  하지만 수덕사에서 발행한 一葉禪文<일엽선문>에서
 보면 1928년도에 입산하여 1971년 1월 28일 새벽 자신이 건립한 비구니 선원에서 열반에 
들었다 한다.  그리고 견성암에서 수도 생활에 들어 갔을때가 38세라는 것이다.  
 <2001년  一葉禪文 초판발행 에서>

그러니까 세속에서 33년, 법랍으로는 43세가 된다는 것이다.  일엽스님의 내력에 대해서는 
어느것이 맞는 이야기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중요한것은 그런것이 아니라 인간 김일엽이라는 
사람이 출가를 하여 과연 어떠한 삶을 살다 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세간 사람들의 
눈에는 일엽스님의 모습이 근대문학의 여류문학도나  개화기의 여성운동가 그리고 출가 
수도자의 모습으로 보일수도 있고, 또 일부의 사람들은 송춘희의 유행가 가사 처럼 
 
속세에 두고 온님 잊을길 없어 ~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아아아 ~                                                                                            
수덕사아에 ~ 쇠북이 우운 다아 ~                                
 
이런식으로 속세에서의 사랑 행각이 실패로 돌아가자 산길 백리 수덕사로 찾아와 머리 
깍고 스님이 되었지만, 속세에 두고온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우는 모습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긴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서 불가에 몸을 담은것도 예사롭지 않는데 두 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자유분방한 
연애론을 외치면서 그 시절 주눅들고 억눌렸던 여성들의 해방운동에도 적극 앞장섰고, 
 
죽음을 불사하는 불같은 사랑등등...누구보다 정열적으로 삶을 살아오던 그가 어느 순간에 
스님이라니... 세간 사람들의 술상에서 안주거리로 화제가 되기도 하고, 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흥미있는 화제거리로 오르내리는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일엽스님이 수덕사 견성암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을때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찾아와서는 어머니라 부르자, 자신은 이미 출가한 몸이니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그냥 스님이라 
부르라면서 냉정하게 대했다 한다. 아니 자식이 바다건너 멀리 타국에서 찾아와 어머니라 
부르는데 아무리 출가 수도승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에 어느 어머니가 마음이 편했겠는가?  
겉으로는 태연한척 했어도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출가 
수도승 이라고는 하지만 수도자라고 해서 인간이 아닌가 ?

수도승도 엄연히 따지자면 수도자이기에 앞서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당시 그 아들은 14살이였다 
하고 그 아들을 위로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수덕여관에 있던 김일엽의 친구 나혜석이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최근 자신의 회고록을 책으로 엮은  일엽스님의 아들 일당스님에 위해 알려졌다 한다.  
그때 당시 일당 스님도 화가의 길을 걸으면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다  70 이 다되어 가는 
나이에 불가에 귀의하여 어머니의 뒤를 따르고 있다 한다.  
 
만공스님도 정읍 태인 사람이라 하고 13세 되던해 부친이 돌아 가시자 어머니가 머리깍고 
여승이 됨에 따라 중이 되었다고도 한다.   만공스님은 어머니 따라 중이 되었고 일엽스님의 
아들도 어머니 따라 말년에 중이 되었으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두 분의 살아온 생애가 
너무나 닮아 있는것 같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   "비단장수 왕서방 이야기" )
 
나혜석이 이혼의 아픔을 안고 충남 예산에 있는 덕숭산 자락을 찾아든 이유는 거기에 나이도 
같은 동갑이고 잡지 <폐허>와 <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이 파란만장한 32년 
속세의 삶을 접고 여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은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했지만 
답은 똑같았다.

몇 년 전 경성에서 만났을 때,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텅 빈 여관방에는 지친 몸을 누이던 나혜석의 체취는 
간데없고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시위하던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 네살 앳된 소년이 찾아왔다. 

그 소년이 
누구냐 하면,김일엽이 일본 유학시절 일본 명문가 출신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이며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진이다.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 
베게를 해주고 젖무덤을만지게 해주었다. 이때 나혜석 역시 모성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을 
못 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관리인도 떠나버린 여관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인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쓰레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고 곰팡이 냄새만 넘쳐나는 
여관방 어디에도 모정에 굶주린 태진에게 가슴을 열고 봉긋한 젖무덤에 소년의 
손을 끌어다 얹어주던 나혜석의 모습은 없었다.

여류서양화가 나혜석 자화상
 
지금으로부터 78년 전 1927년. 그 당시 일반인들은 감히 꿈도 못 꾸는 세계여행을 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돌아와 서양화를 그리는 최초의 여류화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뭇 남성과 사랑도 많이 했고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나혜석이 홀로 산사(山寺)에 
있는 친구를 찾아와 여관방에서 친구의 아들에게 가슴을 열어준 사연은 무엇일까? 수덕사 
서편 산중턱에 있는 이 암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禪房)으로 원래는 정혜사 
동쪽에 초가집으로 지어져 있었다.1930년 만공스님의 뜻에 따라 도흡스님이 창건한 
이래 개축을 거듭하다 1965년 벽초스님에 의해 법당을 인도식 2층 석조 건물로 이전 
건립하고 서선당·요사 등의 전각을 조성하여 현재에 이르르고 있다. 현재 이 암자는 
백여명의 비구니들이 수도 정진하고 있으며 전국 여승들이 참선, 정진하는 수련장으로는 
제일로 삼고있다.  (출처 : 엠파스블로그  세상살이 엿보기-muti007의 블로그) 

[출처] 작성자 아르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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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 관련...

수덕여관 다락벽 벽지에서 발견된 고암 이응노 화백의 습작 훼손은 근·현대 문화재에 
대한 무지가 빚은 결과다. 대형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부지조성을 할 경우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듯이 기본적인 조사 과정만 거쳤다면 소중한 자료로 평가될 고암의 
초기 습작자료가 훼손되는 일은 적어도 예방할수 있어기 때문이다. 수덕여관은 
고암 미망인 박귀희여사(2001년) 작고후 흉물로 방치돼 있던 것을 예산군이 
4억원을 들여 지난해부터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사업이다. 공사가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어 오는 7월 중에 완공, 일반인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그러나 복원에 앞서 
수덕여관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 등 사전 기초조사가 절대적으로 미흡해 이같은 
우를 범한 것이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노 뿐만아니라 개화기 신여성이자 최초 
여류화가 나혜석과도 관계가 깊다. 44년 이응노가 수덕여관을 매입하기 전까지는 
나혜석이 살았었다. 당시 나혜석은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을 만나 출가를 요청했으나 
“임자는 중 노릇 할 사람이 아니야”라며 거절을 당했다. 

출가를 거절당한 나혜석은 
수덕여관에 정착, 수덕사에 있던 일엽스님과 교류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찾아오는 
예술인들을 만나던 곳이다. 소유주가 고암으로 바뀐 뒤 고암은 58년 프랑스로 떠나기전까지 
기거를 했으며, 수덕사 주변을 중심으로 작품 사생활동을 했다. 벽지속에서 발견된 
작품중에서도 산사, 스님 등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가 않다.
 
67년 동백림 시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후에도 2개월동안 수덕여관에 머무르면서 뒤 
뜰 너럭바위에 문자추상으로 암각화를 새겼다. 
" 이 암각화엔 삼라만상의 영고 성쇠가 다 들어 있다" 라고 고암은 말하였다

이번에 발견된 목판에 문자추상을 새긴 것도 이 시기에 제작을 한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근현대 화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수덕여관복원공사를 하면서 정밀조사 없이 
공사를 추진한 것은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다. 적어도 수십년에 걸쳐 반복 적으로 도배를 
해 두텁고 누렇게 변질된 벽지 정도는 확인했어야 했다. 이제 훼손된 습작의 책임 소재를 
밝히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단지 이를 계기로 근·현대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해 사회적 관심을 갖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상태가 양호한 작품을 선별, 
가급적 원형에 가까운 복원 작업이 시급한 과제다. 복원후 고암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이들 작품을 전시할 기념관 건립도 충남도와 예산군이 적극 나서서 검토해야 할 사안이다. 

*** 변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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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을 둘러 싼 세 여자, 세 남자 이야기

                               -김승웅 글방에서-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 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타고
서해를 향하던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한때는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 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이제 이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세 여자와 세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 여자란 김일엽, 나혜석. 박귀옥(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고,
세 남자란 송만공 스님, 이응로 화백. 김태신(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 사이에 난 사생아)을 말한다.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두 폐미니스트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한국 최초의 신여성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1인 시위 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오는 예술인과 소일한다.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신은 이 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이러한 연유로 김태신도 후에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을 만나려 자주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 화가일 뿐 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옥 여사는 변치 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박귀옥여사가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이화백이 납치되어 형무소에 수감된다.
박귀옥은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
 
출옥 후 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수리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슬러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그리고는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나버린다.
 
박귀옥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려 온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 날 같은 희망으로 살아 왔지만,
고암은 1992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 볼 수 없는 박귀옥은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
 
그녀는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녀의 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암이 남겨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 오리그림이 걸려 있다.
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꼭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2001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옥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제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추억의 인물은 김태신 한 사람만 직지사에 생존해 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 (김태신).....그가 바로 일제 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 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0세 노인이 된 노스님이 털어 놓는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이야기...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
영혼의 안식처 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지 31년 만의 일이다.
이로써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여섯사람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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