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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




천재 시인 고죽 최경창.

조선 중기 최고의 스캔들!

최경창과 홍랑

운명같이 시작된 사랑-간밤 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1573년.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

들이 터진다. 스캔들의 주인공은 천재 시인 최경창과 함경도 관기 홍랑. 평소 최경창의 시를 즐겨 읊으며 최경창을 흠모 해왔던 홍랑. 최경창의 부임지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듬해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둘은 이별하게 된다.

 홍랑과 헤어져 서울로 가는 길목. 함관령에 도착한 최경창 앞에 한 장에 서신이 도착한다.

“묏가지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조선판 지독한 사랑, 그 주인공 -시인 최경창과 홍랑

스무 살이 되기도 전, 이율곡 송익필 등과 함께 ‘팔문장계’라고 불렸던 최경창. 조선 중기 삼당시인으로 손꼽히는 최경창의 시는 중국의 <열조시집>과 <지북우담>에 실리기도 했다.

최경창의 절구는 편편이 모두 깨끗하고 맑아

당대의 여러 시인들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 <국조시산 中>

 

홍랑 역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시조 <묏버들가>를 노래한 시인이었다.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두 문장가의 사랑과 그들의 시(詩)! 한국사전에 담았다.

        목숨을 건 사랑 -천리길을 건너다!

함경도에서 돌아온 다음해 최경창은 병에 걸린다.

 이 소식을 듣게 된 홍랑. 당시 조선에서는 함경도 거주민은 함경도를 떠나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고 있었다.

법을 어기면서 까지 최경창을 다시 보고자 하는 홍랑. 목숨을 걸고 칠일 밤낮을 걸어 서울로 향한다.

 맺어지지 못한 사랑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 돌아올까

 

홍랑의 간호로 병에서 완쾌된 최경창. 그러나 조선 사회는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최경창은 관비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버젓이 함께 살고 있으니

이는 너무 거리낌 없는 행동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선조실록 1576년 5월 2일

  이별을 앞 둔 최경창과 홍랑. 둘은 헤어지며 이별의 시를 읊는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운 난초를 건네노니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나 돌아올까

함관의 옛 노래는 부르지 마소

지금도 구름과 비에 푸른 산이 어둑하니 <증별>



못다한 인연 - 계속되는 사랑!

  최경창이 세상을 떠나자, 최경창 묘에 나타난 홍랑. 그녀는 스스로 얼굴을 훼손.오로지 최경창의 무덤만을 지킨다.

후에 고죽이 세상을 떠나자, 묘소가 있는 파주로 찾아와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쳤다. 이후 6년, 얼굴에 상처를 내고 세수도 않고 머리도 빗질 않고, 뜨거운 숯을 삼켜 스스로 목소리와 노래를 잃고 수절 하다가 죽었다. 홍랑이 죽자 정성에 감격한 문중에서 고죽의 묘 아래에 홍랑을 장사 지내주었다. 신분의 차이를 넘어 목숨까지 바친 홍랑의 사랑이 아름답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조선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가운데, 홍랑은 최경창의 시를 지고 피난을 떠난다.

  홍랑이 죽고 난 뒤, 최경창의 후손들은 그녀의 절개를 기려, 그녀를 최경창의 묘 아래에 묻어준다. 최경창과 홍랑. 비록 살아서 이루지 못한인연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경창 [崔慶昌, 1539~1583] 
본관 해주(海州). 자 가운(嘉運). 호 고죽(孤竹). 박순(朴淳)의 문인.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팔문장으로 불리었고 당시(唐詩)에도 
능하여 삼당파(三唐派)이라고도 일컬어졌다. 1568년(선조 1) 증광시문과(增廣試文科)에 
급제,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지냈다. 1583년 방어사(防禦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상경 도중 죽었다. 시와 서화(書畵)에 뛰어났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 숙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문집에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다. 

..................................................

낙봉인가?

東峯雲霧掩朝暉[동봉운무엄조휘]。
 동쪽 뫼에 구름 안개 아침 햇살 가리우니
 
深樹棲禽晩不飛[심수서금만불비]。
숲 깊이 깃든 새는 늦도록 날지 않네
 
古屋苔生門獨閉[고옥태생문독폐]。
이끼 낀 낡은 집은 빗장에 질려 있고
 
滿庭淸露濕薔薇[만정청로습장미]。  
 맑은 이슬 뜰에 가득 장미를 적시었다

..........................................................
大隱巖

 門前車馬散如烟。

 相國繁華未百年。

 深巷寥寥過寒食。

 茱萸花發古墻邊

.................................................


◈ 버들가지로 정표 삼은 홍랑의 가비(歌碑)

                              德田  장 봉 혁 (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회 명예이사) 

홍자성의 <채근담>에 "기생도 늘그막에 남편을 따르면 한 평생의 분 냄새가 
사라지고, 열녀라도 머리가 센 뒤에 정조를 잃으면 반평생의 절개가 물거품이 된다. 
옛말에 이르기를 '사람을 보려거든 그 후반생을 보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명언이다." 라 하였다.  

조선조에 있어서 우리 문학사중 가장 애절한 연정가(戀情歌)로 유명한 예기
(藝妓)의 실증된 내용, 즉 실화로 선조 년 간에  채근담의 교훈처럼 살다간 
기생이 있었다. 그 이름은 홍랑(洪娘)으로 함경도 경성의 이름난 기생이자 
시문에 뛰어난 여류시인으로 삼당 시인의 한사람인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의 
문집 속에  그녀의 문학작품과 함께 전해오면서 후세에 여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오고 있다. 

1. 시문에 능한 고죽 최경창. 
최경창은 본관이 해주로 호가 고죽(孤竹)이다.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율곡, 송익필 등과 함께 
팔 문장으로 불리었다.  당나라의 시문에도 능하여 삼당파(三唐派)의 한사람이기도 하였다. 
삼당파 라는 것은 조선 선조 때의 최경창 ·백광훈 ·이달 세 시인을 일컫는 말로 고려시대 
이래 한국의 시인들이 대개 중국 송나라의 소동파 ·황산곡 등의 시를 배워왔는데, 이 세 
사람은 당나라의 시문을 배우는데 힘을 기울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수준은 만당(晩唐)에 
머물렀으며, 성당(盛唐)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고죽은 1568년(선조 1) 수물 아홉 나이에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그 5 년 후인 
34세 되던해인 1573년(선조 6)에 함경북도의 북도평사로 부임하면서 홍랑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북도평사(北道評事)란 조선의 정 6 품의 외직 문관으로. 병마절도사 밑에서 
일하는 벼슬이었다.  본래 이름은 병마평사(兵馬評事)이고 약칭으로 북평사, 평사이다. 
그 임무는 병마절도사를 도와 도내 순행과 군사훈련, 무기 제작과 정비, 군사들의 군장 
점검, 군사시설 수축 등의 임무를 대신하였으며 병마절도사 유고시에 그 임무를 
대행하였다. 이는 변방에 무신 수령이 많이 임명되고 병마절도사의 권한이 막중하여 
문신관료가 보좌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 경성(鏡城)의 예기(藝妓) 홍랑. 
함경도 홍원 출신인 홍랑은 함경북도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다. 기생의 출신으로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은 아무나 쉽사리 
꺽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가지나 담장 및의 꽃을 의미하는 노류장화(路柳墻花)에 
머물지 않았다. 교방(敎坊)에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단련하면서도 문장과 서화 등의 
기예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잘 다듬어진 예기(藝妓) 홍랑 이었다.  그래서 홍랑은 
관아의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고 미색을 흘리는 여느 기생과는 달리, 그 품성과 
재주가 남달랐다.  

그 문학적 소양과 재주는 이미 양반 사대부나 유명한 시인가객들에 뒤지지 않았으며,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며 몸을 함부로 놀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자들의 유혹은 도를 더해갔으나 홍랑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3. 고죽(苦竹)과 예기(藝妓) 홍랑의 맞남.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
으로 명성이 높았던 최경창이 북도평사로  함경도의 경성에 나타나면서 서로 만나게 
되면서 세세토록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으로 인연을 맺게되었다. 예기 홍랑의 뛰어난 
가무솜씨와 시문의 능력에 짝이 될 만 한 사람이 바로 최경창 이었다.  

최경창 또한 탁월한 문장가인데다, 어릴 적 영암에서 노략질하는 왜병들에게 피리를 불어 
왜병들이 감탄을 하며 물러나게 할 절도로  음률을 잘 알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 또한 
뛰어났던 인물이었는데,  북평사로 부임하면서 서로 정신적으로 상대할만한 짝을 
만나게 된 것이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예로부터 국방의 요지로 취급되는 대단히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은 이미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 중의 오지인 함경도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과 함경도 경성의 최고 예기(藝妓) 였던 
홍랑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기였기 때문에 관리와 
만나는 일은 매우 자유로웠을 것인데, 홀로 생활을 하던 최경창 에게 홍랑은 운명적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우선 정신적으로 딱 맞는 동료이자 짙고 은밀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처지가 
되어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져 한 몸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최경창의 남긴 
기록에 의하면 결국 홍랑은 최경창과 동행하여 군사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부부처럼 정을 쌓아가며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4. 사랑에의 시련.
그러나 이듬해 봄, 두 사람의 사랑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오고 말았다.  
중앙정부의 부름을 받은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었던 기생은 관아에 속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법으로 강력히 구속당하고 
있어서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뜻밖의 이별 앞에 선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별을 눈앞에 둔 
그녀의 심정이 어떠 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 배웅하며 경성에서 
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갔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의 발길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5.  불후의 명 시조 "묏 버들 가려 꺽어" 
함관령 고개를 더 이상 넘을수 없는 홍랑,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산자락 
길옆에 서 있는 산 버들이었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버들가지에 다가간 홍랑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정표인양 건네 주며 구슬프게 
연정가 인 시조 한 수를 읊었다.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산비탈에서 자라고 있는 버들가지를 꺾어 정표로 준 홍랑의 기발한 생각을 고죽인들 
왜 모르겠는가. 버들가지란 잎이 시들었다가도 땅에 심기만 하면 다시 싹을 틔우는 
나무인 것을.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에게 바치는 순정은 항상 님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다는 것을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6. 곧 바로 한문시 번방곡(飜方曲)으로 번역되고.  
고죽은 홍랑의 연정가인 시조 시 한 수를 노래로서 건네 받고, 곧바로  한문으로 
번역하여 <번방곡>이라 이름 붙여 홍랑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번방곡(飜方曲)의 
번(飜)이란 번역한다는 의미이고, 방(方)이란 곧 바로 그 즉시의 뜻이니 곧바로 번역한 
노래라는 뜻이다. 그 한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折楊柳寄與千里人(절양류기여천리인)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須知一夜新生葉(수지일야신생옆)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 <고죽유고>에서.

최경창이 한역한 칠언고시 번방곡은 그의 문집인 고죽유고(孤竹遺稿)에 실려 있다. 
고죽유고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바 있는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되어 있다.  

홍랑의 묘역 앞에 서 있는 시비를 살펴보면, 그 제목이 <홍랑가비(洪娘歌碑)>라 되어 있다. 
그리고 최경창이 변역한 글제목이 번방곡이라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이들 
두사람이 이별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홍랑이 먼저 노래로 불러 준 내용을, 곧 바로 번역하니 
곡(曲)이 아니었을 가 한다. 그래서 고죽유고를 찾아 살펴보면, "노래 한 장을 지어 
나에게 주었다(作歌一章以寄余)"는 구절을 찾아 볼 수가 있다

7. 고죽의 병석을 찾아온 홍랑. 
홍랑은 고죽과의 이별 이후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애끓는 이별을 뒤로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뒤 곧바로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 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아파서 누워있다는 소식은 풍문을 타고 멀고 먼 함경도 경성의 홍랑의 귀에까지도 
들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홍랑의 가슴은 애절하기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곧바로 경성을 출발하여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다. 죄경창의 기록에 의하면 "칠 주야 
동안 쉬지 않고 찾아왔다" 하였다. 거의 2년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난 홍랑은 그의 
수척함에 마음이 아팠지만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그 결과 최경창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차츰 회복되어 갔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봄에는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을 상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양계의 금이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함경남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결국 최경창은 당쟁의 세력다툼이 치열한 당시 사회의 표적이 되어 파직 당했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때는 마침 명종 왕비인 인순 왕후가 돌아 가신지 1년이 채 안 된 
국상 중이라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을 파직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별의 시간을 맞이하여 고죽은 홍랑에게 애절한 시 한 수를 읊어 주었다. 
시의 내용을 뜯어 살피면 이보다 더 애절할 수가 없다.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 
              마음속 정감이 고동 치지만 그윽한 난(蘭)님을 보내오니,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  
              이제 가면 아득히 먼 곳 어느 날에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 
              함관령 옛날의 노래를 다시는 부르지 마오.,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 
              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길 어둡겠지.  

홍랑은 고죽에게 그윽한 향을 풍기는 난(蘭)과 같은 존재였다. 시문의 첫 연에 맥맥
(脈脈)이란 "서로 말 없이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정감이 고동치는 모양"을 표현한 말이다. 
그들은 이번의 이별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슬픈 일화만 남기고 만다. 

8. 얼굴을 난도질하고 시묘 살이 했던 홍랑.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곧바로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이후 복직이 되어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었으나 상경 도중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말았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사망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법이니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랑은 곧 바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마땅히 
없을 것이란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사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사리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방법을 생각해낸 홍랑은  특히 다른 남정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고 살았다. 고생은 그뿐이 아니었다. 고죽의 묘소가 
한강 하류 인근이라 겨울이 되면 차가운 강바람도 참아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하여 3년을 
지나고, 차마 떠날 수 없어 수년 동안의 시묘사리를 계속하였다. 
 
9. 고죽유고(孤竹遺稿)가 남아 있는 것은 홍랑의 공적. 
근 10여 년 동안의 시묘 사리를 마친 뒤에도 고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던 홍랑 이었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홍랑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그 즉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전 국토가 황폐화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고죽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뒤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청석초등학교 북편 산자락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고죽 
최경창의 묘소와 그녀의 무덤이 있다. 1969년 6원에는 홍랑의 묘비를 세우며 비제(碑題)를 
<詩人洪娘之墓>라 하고  고죽의 15 대손 태호씨가 비문을 찬 하였다.  홍랑의 묘소
 아래에는 1981년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의 화원 50여명이 추렴하여  세운 홍랑가비
(洪娘歌 碑)가 서있다
 
그러나 홍랑의 애절한 가비가 서있는 이 묘역은 개발이라는 시대적 변화의 물결을 타고 
불원간 다른 곳으로 옮겨 저야 할 처지이다. 고죽의 후손들이 파주는 물론이고, 전남 
영암, 경기 안성 등지에 살고 있는데 서로 자기네 사는 곳으로 이장하려 하고 있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해주 최씨 종중의 총무를 맡고 있는  최용섭(017-719-3987) 
님의 설명이다.   
 

- 이 글은 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회 간행 <동인>제 196호 (2006년 11월호)에 게재된 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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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멀고도 먼 길  

홍랑(洪娘)은 지금의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조선 선조 때의 기생이다.
조선 선조 때 문인으로 사람들로부터 문장과 학문이 능해 이율곡. 송익필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꼽혔으며, 
또한 당시(唐詩)에 뛰어나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불리었는데 율곡은 
그의 시를 가리켜 청신준일(淸新俊逸)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본래 문과를 통하여 입문한 문신이었으나 함경도 경성에서 여진족을
정벌하여 문무 양쪽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최경창(崔慶昌,1539∼1583)의 
사랑을 받았던 기생이 홍랑이다.   

최경창은 자(字)는 가운(嘉運), 호(號)는 고죽(孤竹)으로 해주가 본관이다. 
중종 24년(1539)에 
나서 선조 16년(1583)까지 산 사람으로 최충의 후손이며 수인(守仁)의 아들로 박순의 
문인이다. 선조 1년(156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대동도찰방을 거쳐 1583년 정언이 
되고, 뒤에 종성부사를 지냈다. 

시와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피리를 잘 불었다. 어려서 영암의 해변에 살 때에 왜구를 
만났으나, 퉁소를 구슬피 불자 왜구들이 향수에 젖어 흩어져 갔으므로 위기를 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상경 도중에 죽었다. 숙종때 
청백리에 녹천되었다. 문집으로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전한다.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蓀谷) 이달과 자별한 사이였다.한 번은 이달이 고죽의 임소
(任所)를 지나다가 정을 주었던 기생이 상인이 파는 자운금(紫雲錦)을 보고 사 달라고 
요구하였다. 때마침 이달은 가진 돈이 없었으므로 최경창에게 증 최경창(贈 崔慶昌)이란 
시를 써서 보냈다.
 
호상매금강남시 (湖商賣錦江南市)      호남의 장사꾼이 강남시에서 비단을 파는데
조일조지생자연 (朝日照之生紫煙)       아침 햇살이 비치어 자줏빛 연기가 나는구려.
가인정욕작군대 (佳人正欲作裙帶)       정을 주었던 여인이 치맛감을 보채는데
수탐장ㅁ무직전 (手探粧ㅁ無直錢)       화장그릇 뒤져 보나 내 줄 돈이 한푼도 없구려 

고죽이 이 시를 보고 회답하여 즉시 쌀 한 섬을 보내니, 이달이 그 기생에게 자운금 한 
필을 사서 주었다고 한다.
"가치로 말하면 어찌 금액으로 헤아리겠소? 우리 읍이 본시 작으니 넉넉히는 보답 못하오."  

요즘들어 최경창과 백광훈 등이 
성당의 시경을 익혔다더니 
아무도 안쓰던 ‘대아’의 시풍 
이들에 와 다시 한 번 울리는구나 
낮은 벼슬아치는 벼슬 노릇이 어렵고 
변방의 살림은 시름만 쌓이네 
나이 들어갈수록 벼슬길은 막히니 
시인 노릇 힘들다는 걸 이제야 알겠구나  

허란설헌이 소녀 때  지은 시로 당시의 훌륭한 시인들이 사회로부터 빛을 보지 못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을 분노와 한탄을 담아서 노래한 것이다. 소위 삼당
시인으로 문명을 날렸던 허란설헌의 스승이자 오빠 허붕의 친구였던 손곡 이달이나 
오봉 백광훈이 벼슬길에 별로 인연이 없었고, 어찌 보면 귀양지 보다 못한 최북단 함경도의 
경성(鏡城)의 임지로 무관이 아닌 뛰어난 시인 고죽 최경창이 발령 받고 있는 것을 보고 
허란설헌이 위와 같은 시를 지었다고 보여진다. 

동생 허균도 스승인 이달에게서 언제나 암울함을 느꼈으며,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만큼 그들 오늬는 비슷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최경창은 1568년(선조1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라 홍랑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의 일로, 선조 6년(1573년) 가을 최경창은 전부터 여진족 등 북방 민족의 침입이 
많았던 함경북도 경성(鏡城) 지방의 북도평사 즉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서른넷의 최경창에겐 이미 처자가 있었지만 북쪽 변방 군막생활을 처자들이 
이겨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가족을 한양에 두고 홀로 부임하였다. 

그 이듬해 봄 최경창이 서울로 전근 명령을 받아 귀경 하였으나 그로부터 2년 후인 
선조 9년(1576) 다시 영광(靈光)군수로 좌천되었는데, 그는 뜻밖의 외직에 충격을 
받고 사직하였다. 
허란설헌의 눈에 비친 현실처럼 최경창은 또다시 변방 군막 생활에서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지방 외직으로 좌천 당하는 불운을 당하고 있다. 

2.  짧은 만남 아쉬운 이별 

처음의 운명적 만남.  

그 첫 만남은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 짧고 아쉬웠다.  
최경창이 1573년(선조 6)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변방인 함경도의 경성(鏡城)으로 가는 도중
홍원의 관기였던 홍랑과 처음 만났고 잠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어느 날 저녁 최경창은 함경북도 동해안의 청진항 근방에 위치한 경성(鏡城) 멀고도 외진 
변방 근무를 위하여 홍원에 들린 그를 위로하고자 홍원 부사가 취우정에서 베푸는 술자리에 
나갔다. 서울을 출발하여 철령 고개를 넘어 안변 원산에 이르고 그리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을 지나 홍원에 당도하여 며칠을 쉬었다가 다시 동해안을 따라 험난한 산길을 천리가량 달려야 
겨우 경성에 도착될 수 있었으니 서울에서 2천리를 상거한 먼 곳이다. 당시의 경성은 여진족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창 끝을 바로 마주한 두만강 유역 무산과 북쪽으로 경계를 하고 있었다. 
해방 전 동해안 명태잡이로 유명했던 신포 항과 아주 가까운 홍원에서 경성까지는 남한의 
경북 울진에서 강원도 주문진에 이르는 해안선 거리와 맞먹는 먼 거리이다. 

이렇게 변방 임무를 명 받고 떠나는 북도평사 최경창을 위한 그 날 저녁의 위로주연 자리는 
홍원부의 관기로 속해있던  홍랑, 선옥, 혜원 등 기생들이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때마침 열 
나흘 둥근 달이 정자 위에 둥실 떠오르자 취흥이 도도해진 많은 사람들의 훤요가 밤하늘에 
퍼졌다. 
 이부사가 호통을 쳤다.  

 "아 늬들은 꿀먹은 벙어리들이냐? 이놈들아, 흥을 돋워야지 자리만 지키고 앉아만 
있으면 되느냐?" 
"아이구, 부사님 너무하신 말씀 마셔요." 
"아아니 너무 하다니. 그래 내 말이 어디 잘못된 데라두 있느냐?"
"그러믄요. 언제 저희들에게 노래 부를 기회를 주셨어요?" 
“그렇지. 임자 말이 맞네. 술만 따르라 했지. 언제 노래를 부르라고 한 적이 없지.”

최 평사가 옆에 있는 기생이 주는 술잔을 받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거 봐요, 역시 최평사님이 제일야.... 호호호..." 

"하하하하..." 

"저놈이 최평사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구려. 그럼 어디 기회를 줄테니..."
"최평사님, 무얼 부를까요? 이하(李賀)의 장진주(將進酒), 아니면 난설헌의 강남곡(江南曲) ?" 
 혜원이 물끄러미 쳐다보며 묻는다.  

"아따 이놈아, 유식한 체 말고 네 맘대로 부르거라. 그것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겠느냐?"
  이부사의 호쾌한 한 소리가 좌중을 잠잠하게 만든다.     

       유리병 호박잔이 짙고
       작은 통에 떨어지는 술은 구슬처럼 붉구나.
       용을 삶고 봉을 구우니 구슬 같은 기름이 끓는데,
       비단 휘장은 향기로운 바람을 에웠구나.
       용적을 불고 타고를 치는 흥겨운 소리에
       호치로 부르는 노래 가는 허리 아름다운 춤이구나.
       하물며 이 푸른 봄에 하루 해가 늦어 가니
       복사꽃은 붉은 봄비처럼 어지러이 지는구나.
       그대에게 권하노니 온종일 마음껏 취해 보세.
       술잔은 유령의 무덤 위에 다시는 못 간다오. 

이하(李賀)의 장진주시(將進酒詩)가 혜원의 맑은 목소리에 달 밝은 밤하늘을 울려 퍼진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소리가 요란하고, 다시 술잔이 올려진다. 

"여보 최평사, 노랠 들었으면 화창을 해야지요." 

"아 아니오, 혜원의 노래는 이부사가 받아야 하는 게요." 

"옳지, 홍랑아 네가 대신 받아라. 아 어서."      

함정환불어(含情還不語)       하소연할 길 바이 없어 말 못하는 이 마음
여몽복여치(如夢復如痴)      이것이 진정 꿈일까 아니면 어리석음일까.
녹기강남곡(綠綺江南曲)       대답 없는 <강남곡(江南曲)>을 비파에 실어 보나
무인문소사(無人問所思)      내 심정 묻는 이는 한 사람도 없구려. 

홍랑의 낭랑한 음성이 비파 소리에 더욱 청아하다. 노래가 끝나자 최경창은 무릎을 
치고 술잔을 가득 부어 홍랑에게 권하며 칭찬한다.  

"너의 그 심사를 이제껏 눈치채지 못한 이 어리석음이 자못 크구나."  
"아니, 최평사가 아까 혜원의 노래에 화창하지 않은 것은 다 속이 있어서 그랬구려." 
"거 보세요. 전 벌써 눈치채고 있었어요."   

혜원이 종알대며 입을 삐쭉한다. 
"그래, 우리 둘이서 짝이나 맞추자꾸나. 최평사는 홍랑에게 맡기고 어서 이리 오너라." 
이부사가 혜원을 끌어 안자 좌중이 박장대소한다.  그날 밤 주연이 파한 후에 
고죽(孤竹)은 홍랑을 불렀다.  

"홍랑아, 내 네 집안 일을 다 들어 알고 있었다." 

"녜? 평사님께서 어떻게..." 

"내, 네 어머님의 일과 너의 극진한 효성, 그리고 최의원의 일까지 잘 알고 있느니라." "....." 

 "그 극진한 효성이 가상하구나." 
 "......"

깊어가는 가을밤  촛불이 지짓 심지를 태운다. 홍랑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한동안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홍랑아, 눈물을 거두렴. 네 눈물을 보니 나도 마음이 아프구나." 
"송구스럽사옵니다. 미천한 것을...." 

"아니다. 부혜생아(父兮生我) 모혜국아(母兮鞠我) 욕보기덕(欲報其德) 호천강극
(昊天岡極)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의 아름다운 효심을 누가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 

고죽(孤竹)은 손을 들어 홍랑의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한다. 일개 천기(賤妓)인 자기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고죽이 고마웠다. 이 어른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의지하고, 거기서 
아득히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체취를 느끼고 아니 따뜻한 남자의 크고 넓은 가슴에 자신을 던져 거기에 
모든 걸 맡기고 싶었다. 홍랑은 고죽의 가슴에 쓰러져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왜 그러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처음 만난 고죽은 말없이 홍랑을 감싸 안았다. 

최경창의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최경창이 홍랑을 만나는 장면을 좀 다르게 
애기하고 있다. 변방에 군사적인 임무로 일종의 순찰을 나갔다가 그 지역의 관리가 
마련한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그 자리에 홍랑이 있었다. 술이 오가고 시를 읊는데 홍랑이 
고죽이 있는지도 모르고 고죽의 시를 읊었다. 고죽이 이에 누구의 시를 좋아하느냐 묻자 
고죽의 시를 좋아한다 하였고 그제서야 고죽이 자신을 밝혔다는 것이다.  

천리에 맛나따가 천리에 이별하니

천리 꿈속에 천리님 보거고나

꿈깨야 다시금 생각하니 눈물계워 하노라 

<강강월(康江月 )>  

최경창은 재색을 고루 갖춘 홍랑을 각별히 사랑하여 변방 임지로 떠나는 길에 그녀를 데려 
가려 몇 번이나 궁리를 거듭했으나 변방이라 위험하기도 해서 차마 데리고 가진 못하고 
기약만 남긴 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먼저 떠나고 만다. 

천리 천리아녀 지척이 천리로다 

보면 지척이요 못보면 천리로다 

지척이 천리만 못하니 그를 슬허 하노라 

<명천 明天> 

3.  어머니를 향한 다함이 없는 효심  

홍랑(紅娘)! 그녀는 함경도 홍원의 이름난 기생이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그녀는 홀어머니를 뫼시고 살면서 둘도 없는 효녀 라는 칭찬이 
자자했던 홍랑은 어려서부터 미모가 뛰어났고  천부의 시재(詩才)를 갖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어머니가 깊은 병으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를 못하게 되자 어느 날 어린 홍랑은 80리 
떨어진 곳에 명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어린 몸으로 혼자서 꼬박 밤낮으로 사흘을 걸어 
찾아갔다. 찾아 온 어린 소녀의 효성에 감탄한 의원은 나귀 등에 홍랑을 태우고 그녀 
집에 도착했으나, 이미 어머니는 숨져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으로 홍랑은 쓰러졌다. 
어머니의 병을 보러 왔던 의원은 홍랑을 치료하는 일이 더 급하고 큰 일이었다. 슬픔과 절망 
속에 동네 어른들의 주선으로 어머니를 양지 바른 뒷산에 묻고, 몸도 부실한 상태에서 어린 
홍랑은 석 달을 어머니 무덤 옆에서 떠나지 않고 울음을 토하며 살았다.
천애의 고아, 당시 홍랑은 12살이었다. 12살 어린 소녀가 어찌 성천기(成川妓) 채소염
(蔡小琰)이 지은 만인(挽人)을 알았으랴마는 그때 어머니를 여의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슬픔을 되뇌어 볼 수는 있으리라.  

상심최시북망산(傷心最是北邙山)        세상에 가장 슬픈 건 저기 저 북망산(北邙山)
일거인생부재환(一去人生不再還)         한 번 간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네.
약위사생론부귀(若謂死生論富貴)          죽고 삶을 부귀로 바꿀 수만 있다면야
왕후하재야대간(王候何在夜臺間)        왕후 장상들이 어이하여 저승에 갔을까.

 최의원은 그 후 다시 와서 홍랑의 갸륵한 효심과 사람됨을 보고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수양딸처럼 그녀를 거두었다. 시문을 배워 주고, 여자가 해야 할 예의 범절 등 
육예(六藝)를 가르쳤다. 

홍랑은 절세가인으로 자라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났고 천부적인 시재를 가꾸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서린 고독, 부모를 그리는 정한(情恨), 그것은 그녀의 예쁜 얼굴에 
그림자를 지게 했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깊은 한숨이 버릇이 되었다. 처마끝에 
날아드는 제비를 보고, 저녁이면 울타리의 둥지를 찾는 새들을 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한나 둘 세 기러기 서남북(西南北) 난화나라 

주야(晝夜)로 우러네니 무리일흔 소리로다

언제나 상림추풍(上林秋風)에 일행귀(一行歸)를 하리오

이언강 (李彦綱)  

수양 부모 최의원 내외의 극진한 애정도 그녀의 뼈아픈 고독을 달래 줄 수는 없었던가…  
간곡히 붙잡는 최의원의 주름진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외면하고 기어이 양부모의 
집을 나서는 홍랑도 통곡하며 울었다. 보내는 가족, 떠나는 홍랑, 모두가 보내기 싫고 
떠나기 싫은 사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고향(思故鄕)     

전강야우창허사(前江夜雨漲虛沙)        앞강이 간밤 비에 모래밭 되었구나.
만리동정일범사(萬里同情一帆斜)       먼 바다 만리 길에 고향 가는 저 배야.
요상고원춘기도(遙想故園春己到)         날새라면 새봄에 고향 찾아가련만
공회무뢰좌천애(空懷無賴坐天涯)        이 몸은 타관 만리 의지없이 예 남았나.

부용    

우선은 어머니의 무덤이라도 자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떠남의 이유였다. 그 효성, 그 정성을 아는 최의원은 더 이상 홍랑을 잡지 않았다. 
다만 무사하기만을 마음으로 기원했다. 그러면서 총명하고 예쁘고 결심이 굳은 인간됨이 
어려운 세상을 능히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집에 돌아온 홍랑은 어머니의 무덤을 돌아보았다. 무덤의 잡초를 하나하나 뽑아 내었다.

그 후 홍랑은 기적에 몸을 얹었다. 천애의 고아! 혼자의 몸으로 세상을 살아 가기에는 
차라리 기적에 몸을 올리는 것이 제일 나은 길일는지 모른다. 홍랑은 고심했다. 언제든지 
마음이 가라앉거든 돌아오라시던 최의원의 집을 생각했다. 그러나 더 이상 신세를 지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짓이라는 생각에 돌아가기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기생이 된 그녀를 아까워했다. 그러나 기적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되어 뛰어난 미모에 천부의 시재(詩才), 최의원 집에서 배운 양갓집 규수로서의 
예의범절,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홍랑은 일약 유명해 졌다. 
짖궂은 한량, 부잣집 자제, 권력있는 세도가들이 다투어 돈꾸러미를 나귀에 싣고 홍랑의 
집을 찾았다. 문지방이 달았다. 그러나 홍랑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뛰어난 기지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곤 하였다.  

취객만라삼(醉客挽羅杉)      술 취한 나그네여 치맛자락 잡지 마오.
나삼수수열(羅衫隨手裂)       비단 치맛자락이 손끝에 찢어지리다.
불석일라삼(不惜一羅杉)      치맛자락 찢어진들 아깝지야 않지만
단공은정절(但恐恩情絶)      당신과의 은정(恩情)이 끊어질까 두렵다오. 

매창의 시비 뒷면에도 새겨져 있는 ‘어떤 취객에게’ 라는 제목의 이 시는 많은 기생들이 
한결같이 정절을 지키고자 불러야만 했던 내용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소춘풍, 송이, 
매화, 황진이, 홍랑 이들 모두가 이렇게 술 취한 저들의 끈질긴 유혹을 이겨 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4.  버들가지에 의탁(依託)한 애별가(哀別歌)

두 번째 만남 

너무나 아쉽게 헤어진 연인을 사무치게 그리워 하던 홍랑.... 그녀는 참말로 지순한 사랑에 
모든 걸 거는 그런 여인이었나 보다.  보고픈 마음에 하루가 여삼추 같았던 그녀는 마침내 
남장(男裝)을 하고 천리 길을 걸어 경성으로 찾아 간다. 

당초 홍원부 관기로 기적에 올려져 있는 홍랑은 몸이 자유롭지 못하였고 홍원을 맘대로
떠날 수 있는 신세가 아니었다. 그리운 님이 가 있는 변방으로 가기 위해 이부사에게 
방직기(房直妓; 변방 사졸의 수발을 드는 기생. 변방에 관리나 병사가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게 하기 위함 )로 보내달라고 청을 넣고 허락을 하지 않자 자살 소동을 벌리고 하여 
드디어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세종 이후 당시 관습에 따라 기생들로 하여금 변방의 관리들의 방직기(房直妓)가 되게 
하였는데 홍랑 역시 그와 같은 예를 따른 것이다. 변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현지처와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라도 지척이오

마음이 천리오면 지척도 천리로다

우리는 각재천리오나 지척인가 하노라

<작자미상>

찬바람 휭휭 부는 변방의 군막을 물어 물어 최경창이 있는 곳에 드디어 무사히 도착하고… 
서로 그리워했던 두 사람은 한동안 행복한 동거시절을 막중(幕中)에서 보내며 죽음보다   
강하고 시보다 감미롭고 꽃보다 향기롭고 나비보다 아름다운 절대사랑을 나눈다. 

북쪽 변방의 삭풍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을 꿈같이 보낸 그 이듬해 최경창은 다시 
서울로 부임명령을 받게 되었다. 완전히 기적(妓籍)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 방직기로서 
홍랑은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따라 갈 수 없는 제약을 받아 할 수 없이 원래의 소속이었던 
홍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픈 이별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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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얼굴에 상처 내고 가슴에 묘막을 짓다.
 

비는 온다마는 님은 어니 못오는고

물은 간다마는 나는 어이 못 가는고

오거나 가거나 하면 이대도록 그리랴 

<작자미상>

최경창은 파면 후 복권돼 종성부사로 간 지 1년 만에 한양으로 돌아오다 1583년(선조 16) 
객관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 때 그의 나이 45세.... 


임니별 하든날 밤에 나는 어히 못 죽엇노

한강슈 깁흔 물에 풍덩실 빠지련만 

지금에 사라 잇기는 임보랴고 그리헌다

<작자 미상>

최경창의 죽음이 알려지자 홍랑은 그의 무덤 옆에 묘막(墓幕)을 짓고 그 곱디 고운 얼굴을 
스스로 훼손한 뒤 세수도 않고 머리도 안 빗으며 9년 동안을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며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평생을 두고 기껏 세 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 사랑을 나눴을 뿐인데도 무려 9년간이나 
시묘를 살았다 하니 그 사랑의 깊이가 그리고 그 애정의 지순함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사람이 죽어지면 어드러로 보내는고 

뎌성도 이성갓치 님한데 보내는가 

진실노 그러곳 할쟉시면 이제 죽어 가리라 

<무명씨>

허벅지에 쑥뜸을 떠서 역병인 것처럼 속여 수절했던 기생은 있어도 기생의 생명인 얼굴에 
스스로 상처를 내서 남자의 유혹을 막고 평생을 수절한 기생은 홍랑 말고는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으리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시고(詩稿)를 정리하여 등에 짊어지고 다녀서 
겨우 병화(兵火)에서 피신했고 그 덕분에 최경창의 시가 온전하게 오늘날에 전해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홍랑은 임종할 때에 "나를 님 곁에 묻어 주오" 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완고한 해주 최씨 
가문에서도 그녀의 정절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기리어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하며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묘를 가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초에는 파주시 월롱면 영 태리에 있는 누대 선영하에 모시었으나 정부시책상 
증발되어 후손들의 주선으로 교하면 다율리로 고죽선생과 함께 1969년 6월 12일 
천장되어 심산의 한떨기 유향이 고죽선생의 유덕을 문중사화로만 그치니하고 새로 
비명하여 홍낭 시인도 함께 영세를 기하는 동시 숭문상덕(崇文尙德)의 조훈에 보답하기 
위하여 문명을 다시 현창하였다 한다. 

사라셔 동실(同室)하고 쥭어셔 동혈(同穴)하니 

은정도 중커니와 예법을 찰일거시

금슬(琴瑟)을 고타시하여 상경여빈(相敬如賓)하여라 

<작자미상> 

홍랑은 비록 평생 동안 이처럼 최경창을 세 번 짧게 만났으나 영원을 함께 한 지고 
지순한사랑으로 최씨 문중과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켜 당시 풍류를 읊조리는 자리에서는 
시를 논하고 

 가무에 화창하여 어울리면서도 화류계 여자라고 배척하고 양반 적서의 차별이 심하여 
겨우 첩실(妾室)로나 받아들이던 사회에서 기생 중에서 유일하게 양반의 문중에 
받아들여진 여인이 되었다
 

홍랑, 그 지독한 사랑 / 구석기  

내가 가진 전체는 오로지 
평생에 단 세 번 봄비를 맞고 
흙밖으로 나와 너 하나만을 만나서 
저렇게 지독하게 살아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지렁이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전생에 조선의 기녀 홍랑이었다 
감히 말하는 여인을 
나도 최경창이 되어 찾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살아서 닿을 수 없는 
먼 벽지의 유배길이다 
묏버들 갈해 꺾어 보내니 님의 손에,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는 것일까 
홍랑에게 사랑이란 
아무것도 침범하지 못하게 
자신의 울타리를 높이 세우는 것이다 
홍랑의 사랑은 얼굴에 상처를 내고 
가슴에 묘막을 짓는 것이다 
자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7일 밤낮을 달려와 
무덤의 뿌리까지 더듬어 보는 것이 
사랑이라고 거문고를 탄다 가야금을 탄다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나인 것처럼 여기소서 
봄비에 밖으로 뛰쳐나온 사랑 대신 
땅속에 묻힌 사람은 언제 다시 돌아오랴 
사랑은 밤길을 가다 만날 수 있는 
달빛 그림자가 아니라 
가늠할 수 있는 깊이의 우물이 아니라 
단지 오래되어 쓰러진 
비석 같은 절대적인 기약인 것이다 
사랑은 십년 동안이나 
세수도 않고 머리도 빗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는 것이다 
 

7.  고죽유고 산책   

고죽 최경창과 홍랑 두 사람 사이에 남겨진 후손은 누구일까?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를 소상히 적고 있는 <회은집>에 따르면 유일자(有一子), 
즉아들 한 명을 두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는 누구일까? 취재진의 추적결과 최경창의 
서자 최즙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며 그 후손이 현재까지 핏줄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7년 임진왜란의 피난 길에서도 최경창이 남긴 고죽유고를 챙겨 등에 
짊어지고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지켰던 홍랑에겐 최경창의 시문이 담긴 서책이 곧 
바로 두 사람 사이에 남겨진 사랑의 열매였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이 되려나… 뒷 
사람들이 고죽 유고를 펼칠 때 마다 홍랑의 지순한 사랑의 숨길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면 그 것으로 족하다고 할 수 있으려는지….    

제 한 목숨 지키기에도 겨웠던 임진 난리통의 피난살이가 아닐지라도 글이 솥에 
들어가느냐는 400여 년 전의 헐벗고 배고프던 시절 쌀 한 주먹이라도 더 이고 지는 대신 
당장 허기를 면하는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서책보퉁이를 무슨 보물단지처럼 껴안고 
다녔다는 것은 육이오 피난길을 걸어 본 사람이 아닐지라도 참으로 대단한 정성이자 
간수가 아니었을 것임을 쉽사리 깨닫는다. 

최소한 죽기 살기로 고죽 유고를 지키겠다는 의지와 결심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고죽유고에 실렸던 최경창의 한시 몇 수를 훑어보고자 한다. 

 동일서회(冬日書懷)  겨울에 마음을 적다 

                 
양주동불한 (楊州冬不寒) 양주의 겨울은 춥지가 않아
납월견청초 (臘月見靑草) 섣달에 푸른 풀을 보는구나.
가재락양서 (家在洛陽西) 집은 낙양의 서쪽에 있는데
미귀인욕로 (未歸人欲老) 사람은 늙는데 돌아가지 못한다


감우 (感遇) - 그냥 생각이 나서 

인심여운우 (人心如雲雨) 사람의 마음은 비구름 같은 것
번복재수유 (飜覆在須臾) 잠깐 사이에도 이리저리 바뀌고 
소사염흑색 (素絲染黑色) 흰 실에 검정 물들이면 
안능복기초 (安能復其初) 어찌 처음 색으로 돌아가리
아아군비조 (啞啞群飛烏) 까악까악 까마귀 떼 날아
집아전중려 (集我田中廬) 우리농막에 모여들었는데
자웅경막변 (雌雄竟莫辨) 암수 구별할 수 없어
읍제공희허 (泣涕空欷歔) 주르륵 부질없이 흐르는 눈물

 

홀억서암승 (忽憶西菴僧) - 스님을 생각하며 

추산인와병 (秋山人臥病)   산은 가을이요 사람은 병들어 누웠는데 
낙엽복행경 (落葉覆行逕)   낙엽은 산사로 드는 길을 덮었구나. 
홀억서암승 (忽憶西菴僧)   문득 서암의 스님을 생각하니 
요문일모성 (遙聞日暮磬)   멀리서 저녁 종소리 들려오네 
자봉은귀주 (自奉恩歸舟)    봉은사에서 배 타고 돌아오며

귀인임발절매화(歸人臨發折梅花) 떠나기에 앞서 매화를 꺽어들고
보출사두일우과(步出沙頭日又斜) 백사장에 걸어나가자 해가 또 기우네
수전산이주거원(水轉山移舟去遠) 강물 돌고 산 움직이며 배가 멀어지니
만강이사기풍파(滿江離思起風波) 헤어지는 슬픔이 온 강에 가득 풍파를 일으키네

고봉산재 (高峰山齋) - 고봉군 산 재실에서  

고군무성곽 (古郡無城郭) 오래된 고을이라 성곽조차 없는데
산재유수림 (山齋有樹林) 산 서재엔 나무숲만 둘러 서 있네
재조인리산 (蕭條人吏散) 쓸쓸하게 아전 사람 흩어진 뒤에 
격수도한침 (隔水搗寒砧) 물 저편서 들려오는 다음잇 소리

이 시는 고봉군(高峰郡)에 있는 산 속 서재에서 읊은 시로, 인적이 드문 산 속에서 외롭고
 적막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 시적 주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영월루 (映月樓)  영월루에서

옥람추래로기청(玉檻秋來露氣淸) 고운 난간 가을 드니 이슬 기운 맑아지고
수정렴냉계화명(水晶簾冷桂花明) 수정발은 차가운데 계수 꽃만 환한데
란참일거은교단(鸞驂一去銀橋斷) 난새 타고 한 번 떠나 은하 다리 끊긴 뒤로
초한선랑백발생(怊悵仙郞白髮生) 서글퍼라 서방님은 흰머리만 생겨나네

이 시는 영월루에서 쓴 네 수 가운데 세 번째 작품으로, 시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금은 
초속적이다.이 시는 작자가 영월루에 들려 영월루에서 지난 날 있었던 아름다운 인연을 
그리워하며 쓴 시이다. 

이 시의 화자는 고죽이지만 여성화되어 있고, 시적 주체는 선랑(仙郞)으로 설정되어 있어, 
기생과의 이별 사연을 마치 선녀(仙女)와 선관(仙官)의 이별 사연으로 변용하여 읊고 있다.

 

패강루강제영(浿江樓舡題詠)  대동강 놀이배에서 읊음

수안유유양류다(水岸悠悠楊柳多) 물가 언덕 한가롭게 버들숲들 참 많은데
소강요창채련가(小舡遙唱采蓮歌) 저 멀리 작은 배선 연밥 따는 노래 소리
홍의락진추풍기(紅衣落盡秋風起) 붉은 꽃잎 다 떨어져 가을 바람 불어오니
일모방주생백파(日暮芳洲生白波) 해질 무렵 물가에선 하얀 물결 일어나네

이 시는 정지상의 <송인(送人)>을 차운하여 지은 시인데, <송인>은 송별시(送別詩)인데 
비해 이 시는 채연곡(采蓮曲)이다. 고죽 이외에도 여러 사람이 <송인>을 차운하여 연밥 
따는 노래를 읊고 있는데, 같은 제재이면서도 작자에 따라 달리 표상되고 있다. 고죽은 
이 시에서 다른 사람들 시에 비해 자기 내면의 투영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다. 

기성진상좌승 (寄性眞上座僧) 성진의 상좌승에게  

모암기재백운간(茅庵寄在白雲間) 초가 암자 흰구름 속 붙여놓듯 있는 채로
장노서유구미환(長老西遊久未還) 노 스님은 수행 나가 오래 돌아 못오는데
황엽비시소우과(黃葉飛時疎雨過) 누런 잎들 휘날릴 때 가랑비 내리는 속 
독고한성숙추산(獨敲寒磬宿秋山) 홀로 경쇠 울리면서 가을산서 자겠구나 

이 시는 성진스님의 상좌승에게 준 시로, 상좌승의 생활을 상상을 통하여 그렸다. 
상좌승이 거쳐하는 공간적 배경과 상좌승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작은 암자는 높은 
산에 자리잡고 있어서 마치 구름 속에 얹혀있는 듯한데, 노스님께선 수행을 나가신 뒤 
오래도록 돌아올줄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겠느냐는 것이다. 

봉은사승축(奉恩寺僧軸) 봉은사 시 두루마리에

삼월광릉화만산 (三月廣陵花滿山) 삼월이라 광릉에는 꽃 펴 산에 가득한데
청강귀로백운간 (晴江歸路白雲間) 개인 강에 돌아갈 길 흰 구름 사이 일세
주중배지봉은사 (舟中背指奉恩寺) 배 속에서 돌아보며 가리키는 봉은사엔
촉귀수성승엄관 (蜀魄數聲僧掩關) 소쩍새 몇 마디 속 스님은 문 닫았겠네

이 시는 <봉은사승축(奉恩寺僧軸)>의 제목으로 된 4 수의 연작시 가운데 첫 번 째 시이다. 
봉은사(奉恩寺)는 경기도 광주(廣州) 저도(楮島) 남쪽에 있던 절로, 현재는 행정구역이 
서울로 바뀌었다.

궁원 (宮怨)  궁안에서의 원망 

앵도화락옥계공 (櫻桃花落玉階空) 앵도 꽃은 떨어지고 옥 계단은 비었는데 
누습라건친천홍 (淚濕羅巾襯淺紅) 비단 수건 눈물 적셔 엷은 빛을 띠고 있네
수의숙상무희반 (愁倚繡床無戱伴) 수심으로 비단 침상 기대봐도 희롱할 짝 없으니
환회앵무출금롱 (喚回鸚鵡出金籠) 앵무새나 부르려고 금빛 새장 내어오네

이 시도 앞에서 살펴본 <閨思>와 같이 악부시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시적 주체가 
여성이다. 이 시는 궁안에서 있을 수 있는 궁녀들의 한을 상상을 통해 그려낸 시인데, 
차천로(車天輅)는 <악부신성(樂府新聲)>을 편찬하면서, 궁사(宮詞)․규원(閨怨)․새하곡
(塞下曲)․유선사(遊仙詞) 등 몇편은 제목이 매우 좋은데, 이러한 시들은 그 제목만 바라
보고도 당시(唐詩)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無題, 무제>

군거경읍첩양주 (君居京邑妾楊州) 님께서는 서울 살고 첩은 양주 있으니까 
일일사군상취루 (日日思君上翠樓) 날마다 님 생각에 푸른 다락 오릅니다 
방초점다양류노 (芳草漸多楊柳老) 방초 점차 짙푸르고 양류조차 늘어지니
석양공견수서류 (夕陽空見水西流) 석양 무렵 부질없이 서쪽 흐르는 물만 보네

이 시의 시적 주체도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고, 전형적인 염정류의 시임을 알 수 있다. 
만당(晩唐) 시인인 이상은(李商隱)이 <무제(無題)>란 제목으로 쓴 시가 네 수 있는데, 
이러한 제목의 시들은 대체로 애정류(愛情類)의 시들이 많다.
이 시 속의 여인은 서울에 계신 님 생각에 날마다 푸른 다락에 올라본다. 그런데 기다리던 
님은 오질 않고 방초는 짙어가고 버들가지도 늘어진 계절이 되었다. 그래서 석양 무렵에 님 
계신 서울로 흘러드는 물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도 <궁원(宮怨)>이나 
<규사(閨思)>처럼 시적 주체인 여성의 한(恨)을 상상을 통해 그려낸 작품으로, 시어들이 
화려하고 시 내면의식도 애상적이고 환몽적인 색조를 띠고 있다 

기정원외계함 (寄鄭員外季涵)  원외랑 정계함에게

남궁안곡춘주영(南宮按曲春晝永) 예조에서 연주하니 봄낮은 긴데
화지입란유불연(花枝入欄柳拂筵) 꽃가지는 난간 들고 버들가진 자릴 쓴다
요망홍운수기진(遙望紅雲隨妓陣) 멀리 보니 붉은 구름 기생떼를 따르더니
취루심처주신선(翠樓深處住神仙) 높은 다락 깊은 곳에 신선인양 앉았구려

이 시는 정철(鄭澈 1536-1593)에게 지어 준 시로 정철의 풍류스런 모습을 잘 담아내었다. 
정철은 여러 기록으로 보아 애주가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그의 면모는 가사인 
<관동별곡(關東別曲)>의 마지막 부분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술 때문에 세인들의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42세 때에는 스스로 술을 경계하는 계주문(戒酒文)을 짓기도 하였다. 
송강의 막하에서 종사관(從士官)으로 지냈던 신흠(申欽)은 <송강집(松江集) 서(序)>에서, 
“송강이 술잔을 잡고 술이 반쯤 취하여, 입으로 읊고 손으로 쓰면 장시(長詩) 단가(短歌)가 
섞여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이 시에서도 정철의 이러한 모습을 잘 묘사하였다. 

쾌재정차퇴재운 (快哉亭次退齋韻) 쾌재정에서 퇴재의 운을 빌어서

동남산혜대강래(東南山豁大江來) 동남쪽 산 탁 트인 곳 큰 강물은 흘러오고
일편성임고한개(一片城臨古塞開) 한 조각 성 옛 변방에 터를 잡아 서 있구나! 
백운원미기자국(白雲遠迷箕子國) 흰구름은 저기 멀리 기자 나라 아물대고
홍운반요초왕대(紅雲半繞楚王臺) 붉은 구름 초 왕궁터 반 남짓을 둘렀는데 
금구영리화등란(金𨥁影裏宖亂) 미녀들의 그림자 속 꽃등불은 어지럽고
옥적성중화각최(玉笛聲中畵角催) 옥 피리 소리 속에 뿔피리도 재촉하니
명일별수환만리(明日別愁還萬里) 내일 이별 하고 나면 시름 되레 만릴텐데
양관삼첩진여배(陽關三疊盡餘杯) 양관곡을 세 번 불러 남은 잔을 다 비우세 

이 시는 평양 북쪽에 있던 쾌재정(快哉亭)에서 기생들과 놀이하면서 지은 시이다. 수련은 
쾌재정의위치를 읊었고, 함련은 현장의 시․공간을 역사적 배경이 있는 시․공간으로 변용하였다.
 즉 평양은 그 옛날 기자가 나라를 세웠던 곳이기도 하고, 모란봉에 있는 기린굴(麒麟窟)에는 
고구려 동명성왕에 얽힌 설화가 남아있기도 하다. 함련에서 초왕대(楚王臺)라고 표현한 것은 
정녕 고구려 왕궁터를 연상하고 이 고구려 어느 왕의 사연을 상상하며 초애왕(楚襄王)에 
빗대어 읊은 것이다.
경련은 쾌재정 현장에 기생들이 춤추는 모습과 옥피리․뿔피리 소리가 요란하게 연주되는 
상황을 표현하였다. 미련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다가 내일 아침 작별하고 나면 
수심은 되려 만리나되기에, 이별가나 연이어 세 번 부르며 남은 잔이나 다 비우고 가자고 
하였다. ‘양관삼첩(陽關三疊)’은 <양관곡(陽關曲)>의 어느 한 줄을 세 번 연이어 부르는 것으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려 할 때 시를 읊던 관습이었다. 

송승귀산 (送僧歸山)  스님께서 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며

잠유경국고사귀(蹔遊京國苦思歸) 한양 잠깐 노닐어도 돌아갈 생각 괴로운데 
세모하산독엄비(歲暮何山獨掩扉) 세모에는 어느 산서 홀로 사립 닫으실까?
명일춘생호해로(明日春生湖海路) 다음날에 봄기운이 시골길에 감돌적에 
매화향우습정의(梅花香雨濕征衣) 매화 꽃 향기로운 비 가는 옷을 적시겠지.
.
** 아름다운 여인의 명기 이야기에서 퍼옴


**사진 출처 : http://ipcp.edunet4u.net + kbs






qqpp (2015-08-14 07:51:09)  
조선 중기.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1537~1582),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1539~1583), 손곡 이달(蓀谷 李達,1539~1609)선생은 당나라 이태백, 두보, 왕유에 비유하여 삼당시인으로 불리었다. 세분 모두 같은 시대를 살면서 생애가 불우하여 암담한 현실과 혼탁한 세상에 비애와 고독, 좌절과 불만을 주로 읊었다.

고죽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사랑

고죽 최경창이 34세(1573)되는 가을에 북도
평사로 부임하려고 함경북도 경성으로 갈 때, 홍원에 들렀다가 그곳의 관기 홍랑을 만났다.
홍랑은 12살 무렵에 고아가 되어 마을의 의원에게 글을 배웠다고 하였다. 관기이기는 하였지만 절세가인으로 문학적인 재능까지 뛰어나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동행하여 변방 경성에서 2년 가까이 함께 살며 깊은 정을 쌓았다.
이듬해 봄, 고죽이 서울로 돌아가자 배웅하며 이별의 정분을 나누었다. 돌아가던 중 함관령에 이르러 시조 한 수를 지어 고죽에게 주며 함께하지 못하는 애틋함과 사모의 정을 표현했다.
고죽은 이 시조를 한문으로 옮겨 새로운 7언고시(七言古詩) 「번방곡(飜方曲, 시조를 한문으로 옮겨 재창작한 시)」으로 새 작품으로 만들었다.

묏버들 가려 꺾어 임의 손에 보내오니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돋아나면
초췌한 저를 본 듯 여기옵소서.

이별하는 연인에게 버들가지를 꺾어주는 「절양(折楊)」의 풍속은 중국에서 이별을 뜻하며 재회를 기원하는 증표라고 한다.
고죽은 사랑의 열병으로 시를 지었다. 「님 생각(閨思)」이다.

주렴 걷으니 깊은 어둠 사이 은은한 새벽 빛
밤 깊은 5경 꿈속에 료양에 도착했네.
외론 꾀꼬리 내 시름 거둬 가고
이슬비 가여린 미인(해당화)을 적시네.

그 뒤 3년 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고 그날로 한 달음에 함경북도에서 출발하여 일곱 낮 일곱 밤 만에 서울에 도착 하였다.
이때는 명종의 인순황후 국상 중이었고, 선비가 관기를 데려와 산다고 소문이 나서 파직 되었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적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의 관비(官婢)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에 데리고 와서 버젓이 데리고 사니 이는 너무도 기탄없는 것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9년(1576) 5월2일자.
홍랑은 홍원의 관기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별의 시간, 고죽은 홍랑에게 시 두 수를 지어 주었다. 시 「이별에 주다(贈別)」이다.

아쉬워 보고 또 보며 그윽한 난초 드리오니
이제 가면 머나먼 곳 어느 날에 다시 오리
함관령의 옛날 노래 다시 불러 무엇 하리
지금도 궂은비 내려 첩첩 산길 어둡겠지

후에 고죽이 세상을 떠나자, 묘소가 있는 파주로 찾아와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쳤다.
이후 6년, 얼굴에 상처를 내고 세수도 않고 머리도 빗질 않고, 뜨거운 숯을 삼켜 스스로 목소리와 노래를 잃고 수절 하다가 죽었다.
홍랑이 죽자 정성에 감격한 문중에서 고죽의 묘 아래에 홍랑을 장사 지내주었다. 신분의 차이를 넘어 목숨까지 바친 홍랑의 사랑이 아름답다.
다음 시는 《고죽유고(孤竹遺稿)》에 「제목 없는 시(無題)」라고 실려 있다. 내용을 보면 여인이 멀리 한양에 있는 임을 그리워하며 쓴 시이다. 고죽이 홍랑의 마음을 헤아려 쓴 것인지, 홍랑의 시를 「무제」라고 올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임은 한양에 계시고 첩은 양주에 있습니다.
날마다 임을 사모하여 푸른 루각에 오릅니다.
방초는 짙어지는데 버들은 시들어 가고
석양에 서쪽으로 흐르는 물 멍청히 바라봅니다.
qqpp (2015-08-18 12:51:38)  
送別(송별: 최경창이 홍랑과 이별하면서 준 한시 제목, 전송 이란 뜻)




玉頰雙啼出鳳城(옥협쌍제출봉성) 두 줄기 눈물 흘리며 한양을 떠나가네.

曉鶯千囀爲離情(효앵천전위이정) 새벽 꾀꼬리 우리 이별 알고서

한없이 울고 있구나.

羅衫寶馬河關外(나삼보마하관외) 비단옷에 천리마로

강 건너고 고개 넘는 길.

草色迢迢送獨行(초색초초송독행) 아득한 풀빛만이

홀로 배웅하면서 따라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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